
지난달 울산 북구의 한 병원 주차장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이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이별을 통보한 20대 여성에게 3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중태에 빠뜨린 이 사건은 단순한 폭행이 아닌 살인 미수 범죄였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가해자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피해자를 폭행하고 스토킹했으며, 경찰의 접근금지 조치와 지능형 CCTV 설치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현행 보호 체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변호사로서 수많은 교제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절감하는 것은, 우리 법제가 교제폭력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교제폭력만을 별도로 규율하는 특별법이 없다. 교제폭력은 일반 형법상의 폭행죄, 상해죄로만 처리되고 있는데, 일반 형법으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강압적 통제’ 행위나, 이별 후에도 지속되는 집요한 스토킹과 보복 위험성,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정서적 의존과 두려움으로 신고를 꺼리는 특수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교제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소유물로 여기며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신체적 폭력을 넘어 상대방의 일상을 간섭하고 자유를 빼앗는 ‘강압적 통제’에서 시작해 폭력, 스토킹으로 이어지며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 비극으로 치닫는 연쇄 고리를 보인다. 실제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교제폭력 검거 인원은 2014년 6675명에서 2023년 1만3939명으로 급증했으며, 이는 하루 평균 38건의 교제폭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행 법제의 대응은 미흡하기만그지없다. 무엇보다 해외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교제폭력이나 데이팅 범죄를 별도로 규율하는 특별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제폭력에 대한 명확한 양형 기준도 없어 일반 폭력과 동일하게 간주되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랜 기간 교제했다는 이유로 형량이 감경되는 모순적 상황까지 발생한다. 가정폭력처벌법은 혈연·혼인 관계에만 적용되어 교제폭력은 원칙적으로 적용받지 못하며, 스토킹처벌법의 ‘지속성·반복성’ 기준은 모호해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법적 공백은 단순히 처벌의 약화를 넘어 교제폭력을 ‘개인 간의 다툼’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을 강화시킨다. 특히 피해자가 보복을 우려해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 수사기관의 개입이 어려워지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피해자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교제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호주 등에서는 신체적 폭력 없이도 심리적·정서적·경제적 학대를 통해 피해자를 통제하는 ‘강압적 통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최대 14년까지 처벌하고 있다. 이는 교제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의 초기 단계에서 개입해 비극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방안이다.
우리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교제폭력 특별법 제정이나 가정폭력처벌법의 적용 대상 확대를 통해 교제폭력 피해자도 실질적인 보호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강압적 통제’ 개념을 도입해 물리적 폭력으로 발현되기 전 단계부터 법적 개입이 가능하도록 하고, 교제폭력의 특수성을 반영한 명확한 양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법제 개선과 함께 피해자 보호 시스템의 실질적 강화도 시급하다. 현행 긴급응급조치의 한계를 보완하고, 가해자 구금 등 강력한 잠정조치의 적용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 여성긴급전화 1366, 스토킹·교제폭력 피해대응센터 등 기존 지원 체계를 확충해 상담, 법률지원, 긴급 보호 등 맞춤형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대학생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예방 교육을 의무화해 건전한 교제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울산 사건은 현행 법적·제도적 공백이 피해자의 생명을 얼마나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경고다. 교제폭력은 더 이상 ‘사랑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없는 심각한 범죄다. 국회와 사법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만이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나라 법률사무소 율빛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