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 학생이 주유소 간판을 보며 “무연휘발유가 연기가 나지 않는 휘발유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 ‘연(鉛)’이 납을 뜻한다는 사실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무연’은 납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영어로는 unleaded(언레디드)라 한다. 여기서 lead는 ‘레드’로 발음되며, 납(鉛)을 의미한다. ‘리드(lead 이끌다)’와는 전혀 다른 어원을 지닌 단어다.
초기 휘발유에는 엔진의 노킹(knocking) 현상을 방지하고 연소 효율을 높이기 위해 납이 첨가되었다. 그러나 납이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70년대부터는 납을 제거한 ‘무연휘발유(unleaded gasoline)’가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납 함유 휘발유 사용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굳이 ‘무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휘발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 gasoline 역시 어원이 흥미롭다. 이 단어는 네덜란드어 gas에 휘발성 액체를 뜻하는 접미사 -oline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여기서 gas는 고대 그리스어 khaos(공허, 무질서)에서 비롯된 단어다. 이 khaos는 라틴어 chaos, 다시 영어 chaos로 이어졌으며, 지금은 ‘혼돈’이나 ‘무질서’의 뜻으로 사용된다.
17세기 벨기에 화학자 판 헬몬트(van Helmont)는 연소 실험 중 공기처럼 보이지만, 물질로서의 성질을 지닌 새로운 상태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형태가 없고 흐트러져 있는’ 마치 카오스와 같은 상태라고 보았고, 이에 착안해 당시 발음에 따라 ‘gas’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모든 기체 상태의 물질을 가리키는 과학 용어로 gas가 사용되었고, 이후 기후·에너지·의학 분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gas를 휘발유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영국에서는 petroleum을 줄인 petrol을 사용한다.
‘혼돈(chaos)’과 ‘휘발유(gas)’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언어의 역사에서 종종 마주치는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
심민수 울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