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언양은 해방 전후 신고승 이구소 정인섭 오영수 등 뛰어난 문인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석(愚石) 김기오(金琪午)가 언양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석은 항일운동가요, 언론인이면서 출판인이었다. 이보다 큰 업적은 1955년 <현대문학>을 창간한 것이다. 지령 800호가 넘은 <현대문학>을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해방 후 내로라하는 작가는 대부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유명 작가가 되었다. <현대문학>이 지금까지 배출한 문인이 800여명이 넘는데 그 속에는 김동리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박두진이 있다.
<현대문학> 창간에는 오영수가 많이 도왔는데 그는 <현대문학> 초대 편집장이 된 후 이 책을 통해 후학들을 많이 키웠다.
1900년 언양읍 남부리에서 태어났던 우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 언양 3·1운동 때다. 이후 언양청년회 결성에 앞장선 후 1926년 박병호 동아일보 지국장 그리고 강철 시대일보 기자와 함께 울산기자단을 창립했다. 그가 왜경의 요시찰 인물이 된 것은 이 무렵으로 이해 그는 양산으로 피신했다.
양산에서는 신간회 양산지회 창립에 앞장선 후 인쇄소를 만들어 일제 만행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찍다가 발각돼 1930년 서울로 피신했다.
서울에 온 우석은 한해 뒤인 1931년 왜경에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에서 문초를 받던 중 양다리가 골절돼 이 후 휠체어를 타야했다. 이해 말 형기를 마친 그는 1936년 문화당을 차려 해방 후에는 초중등학생 교과서를 출판했다.
해방 당시만 해도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교과서 출판에 많은 돈을 배정하지 못해 출판업자가 교과서 출판을 꺼렸다. 그러나 우석은 이 나라 발전이 청소년 교육에 있다고 판단, 손해를 보면서도 교과서를 인쇄해 안호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여러 번 우석을 찾아와 직접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우석이 다시 고향에 온적이 있는데 6·25 때 언양 서부리로 피난 와 일 년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갔다.
우석의 업적을 보여주는 ‘교과서 박물관’은 현재 세종시에 있다. 박물관에는 초기 출판했던 교과서와 함께 정원에는 당시 책을 찍었던 인쇄기까지 전시돼 있다. 박물관이 왜 언양이 아닌 세종시에 있나?를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박물관은 규모가 커 박물관을 관리하는 9층 건물이 ‘대한교과서’라는 빌딩 이름과 함께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을 정도다.
필자는 문영 시인과 함께 2014년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관장에게 전시품 일부를 우석 고향인 울산에 전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더니, 관장은 울산에서 전시 여건만 갖춘다면 전시품을 언제든지 임대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문 시인과 필자는 울산의 여러 문화단체에 이런 박물관의 뜻을 전했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울산에서 교과서 박물관에 있던 그의 유품이 전시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울주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