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뉘신지요?”
꾀죄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김 초시를 본 천동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서 참으며 마당에서 넙죽 엎드리고 큰절을 올렸다.
“소인은 송내마을에 사는 백정 양가의 자식 천동이라고 합니다. 초시 어른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인사드리옵니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은 김 초시는 이내 목소리가 변했다. 갓이며 의복 등은 남루했지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너 같은 천한 것이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말해 보거라.”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오나 소인이 듣기로 초시 어른이 송내 저수지 밑에 있는 땅을 팔려고 내놓은 걸로 아는데 사실인지요?”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사실이기는 하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초시 어른, 제게 재산이 될 만한 물건이 조금 있습니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 실한 웅담과 백 년 된 삼산 한 뿌리, 호피 두 장, 표범 가죽이 석 장 있습니다. 그거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건을 봐야 하지만 이 난리 통에 그 정도면 논 열 두락 값으로 부족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김 초시는 다른 말을 했다.
“그 논은 소출이 많은 문전옥답이니라. 그 정도의 물건으로는 다섯 두락밖에 줄 수 없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소인이 물정을 모르고 초시 어른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고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천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서 걸어 나갔다. 김 초시는 당황한 듯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게 섰거라.”
김 초시의 부름에 못 이기는 척 천동은 천천히 몸을 돌려서 김 초시 앞에 다시 넙죽 무릎을 꿇었다.
“천것은 역시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거늘 버르장머리 없이 곧장 일어서느냐? 내가 그 논을 정말 팔기 싫지만 왠지 네놈에게는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특별히 너에게는 싼 값으로 논을 팔 것이니 네가 가지고 있다는 물건이나 가져오너라. 그렇지만 내가 봐서 물건의 질이 떨어진다면 열 두락은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초시 어른.”
“그래, 얼른 가서 네가 가진 것들을 다 가져오너라.”
“네, 소인 바람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천동을 바라보며 김 초시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천동은 나는 듯이 송내마을에 당도하여 기다리고 있던 동무들과 함께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을 챙겼다. 모두가 값비싼 것들이라서 각별히 조심을 시켰다. 지당마을의 자택에서 김 초시는 다소 조바심을 내며 천동을 기다렸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