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직업이나 나이와 같은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체험하는 시간의 속도도 다르고 계산하는 단위도 다르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일주일이나 한 달 단위로 시간을 가늠한다. 일주일마다 휴일이 있고 한 달마다 노동에 대한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봉이란 말이 일상화됐지만, 월급이라는 명칭이 개인이 받는 급여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연봉이 얼마냐고 묻지 않고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직장 생활을 마친 은퇴자들도 매달 연금을 받는다. 이처럼 서민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한 달을 기준으로 순환한다. 경제 활동뿐만 아니라 질병 치료도 마찬가지다. 노인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매달 한 번씩 병원을 찾아야 한다. 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흔한 질병도 한 달을 기준으로 관찰하고 약을 처방한다. 동네 병원에서 혈압약을 받아서 오는 길에 느끼는 노인의 소회도 시간의 흐름과 연관돼 있다. 또 한 달이 지났구나. 또 한 달을 별 탈 없이 살았구나.
좀 더 긴 흐름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들은 4년을 기준으로 말과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것 같다. 선거 시점에 주민의 지지도를 가장 높일 수 있도록 전략을 짜고 말과 행동의 수위를 조절한다. 그들도 4년마다 한 번씩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다짐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은 선거철마다 되풀이되는 통과의례일 경우가 많아서 그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 생애를 관통하는 긴 흐름의 시간 계산법도 있다. 직장인은 어느 시기가 되면 퇴직 일자를 기준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한다. 그리고 그 시기의 나이와 사회적 능력을 가늠하면서 가능한 활동 범위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계획은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의 취업이나 혼인과 같은 주변 요소들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인 셈법이다. 지금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는 정년 연장 문제도 한 세대의 생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삶이 엮여 있는 복잡한 시간 계산법이다.
이보다 더 절박하게 시간을 계산해야 하는 시기도 찾아온다. 목표 시점을 정해 놓고 그때까지 아무 탈 없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를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등산길에서 만나는 친구 중에는 대장암 수술을 겪은 환자가 있다. 그는 사철 맨발로 천천히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나가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어느 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수술한 후 5년이 지났다고, 암에서 해방됐다고. 주위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로 축하해 줬다. 5년이란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매듭은 시간의 회복력이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이다.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시간의 터널을 건너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 병마와의 긴 싸움을 시작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췌장암 수술을 했노라고 담담하게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 술과 거리가 먼 친구의 췌장암 소식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함께 웃으며 밥을 먹는 일보다 더 나은 위로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5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한 방향만 보고서 견뎌야 하는 친구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위에서 생사를 염려하는 환자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의 시그널이다.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분명한 신호다. 노년의 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저마다 다르다. 오늘 하루의 안일과 만족에 집중할 수도 있고 앞으로 다가올 힘든 시간을 대비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육신이 무너지고 와해돼 가는 과정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은 모두 선고를 유예받은 죄수라고 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선고가 언제일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일이 바로 그날이라 여기며 사는 하루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준비한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