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130)]겨울 마굿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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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130)]겨울 마굿간 풍경
  • 이재명 기자
  • 승인 2019.12.09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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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논설위원

기온이 연일 영하권에 머물고 있다. 지난 7일 대설에는 윗지방에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네……‘그 겨울의 시’ 일부(박노해)



겨울 낮은 짧다. 삭풍에 나뭇가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어느새 쇠죽을 끓여야 하는 시간이 돌아온다. 서산에 걸린 해는 얼어붙은 밭머리에 땅거미를 풀어 어둠을 재촉한다. 아이는 가마솥에 콩깎지와 등겨, 짚여물을 가득 쏟아붓고 아궁이 앞에 앉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불을 땠다. 이윽고 5시25분. 고무줄로 전지를 칭칭 동여맨 라디오에서 마침내 ‘태권동자 마루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아이는 행여 라디오가 주파수를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옆에 있는 누렁이도 귀를 쫑긋 세워 들었다.



“달려라 마루치 날아라 아라치 마루치 아라치 마루치 아라치 얍! 태권동자 마루치 정의의 주먹에 파란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 인간과 소의 교감을 그린 영화 ‘워낭소리’ 장면.



마루치 연속극이 끝나면 누렁이의 식사 시간이다.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열면 구름처럼 마굿간의 시야를 온통 가리는 김…. 식사를 기다리는 소의 눈망울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만큼이나 맑다.

사람과 소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경운기가 들어오면서부터다. 밭갈 경(耘)에 김맬 운(耘), 경운기. 이 기계가 도입되면서 소는 찬밥 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2009년 개봉한 영화 <워낭소리>는 바쁜 인간들의 삶에 경종을 울려줬다. 소는 보통 15년 정도 사는데, 누렁이는 최원균 할아버지, 이삼순 할머니와 함께 40년을 살았다. “농약치면 소먹고 죽어, 사료 먹이면 살쪄서 애 못낳아!”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쟁쟁하다.

그런데 그 누렁이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 누렁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할아버지를 태우고 논밭으로 걸어 나갔다. 뚜벅 뚜벅…. 누렁이도, 최 할아버지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누렁이는 어느 날 아침 큰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지 못했다. “…일만 시켜 미안타…”

아득한 마굿간의 추억이 뽀얀 가마솥 김에 어린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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