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흘 동안 울진·삼척 지역에 번지던 산불이 213시간43분 만에 잡혔다. 온 산천을 집어삼킬 듯 하던 화마가 단 몇 시간의 봄비에 진압됐다. 과연 ‘물(水)은 불(火)을 이긴다’는 음양오행설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이처럼 때맞춰 내리는 비를 호우(好雨)라고 한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당나라 시인 두보는 안사의 난으로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 청두에 초당을 짓고 많은 시를 지었다. 이 때 지은 시 중의 하나가 ‘춘야희우(春夜喜雨)’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 쯤 되겠다. 이 시를 바탕으로 지난 2009년 국내에서는 ‘호우시절(好雨時節)’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킨다. 밤사이 내린 봄비에 마른 땅들이 해갈을 하니 초목은 윤택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은 촉촉히 젖는다. 이렇듯 봄비에는 천지의 기운이 있어 만물의 소생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 오르것다.
이수복 시인의 ‘봄비’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명시다. 이번 봄비는 강원도의 거대한 산불을 끄고, 나아가 촉촉해진 대지에 생명의 씨앗을 뿌릴 터이다. 또 이 비 그치면 내 마음에도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올 것이다. 강나루의 서러운 풀빛…우리는 혹독했던 지난 겨울을 걸어서 마침내 봄 앞에 서 있다. 봄비는 이렇듯 눈물겹도록 반갑지만 그 한편에 회한(悔恨)을 품고 있다.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봉긋이 피어오르던 꽃 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 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봄 비는 가슴에 내리고’ 전문(목필균)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가수 이은하의 ‘봄비’가 긴 여운을 드리운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