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어려운 환경에도 학업 정진해 별 달았으나 스스로 생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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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어려운 환경에도 학업 정진해 별 달았으나 스스로 생 마감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5.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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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 차동렬, 권정식(왼쪽부터) 등 3명의 울산 출신 장군들이 1983년 청와대에서 진급 신고를 한 후 함께 장군 진급 기념 축배를 들고 있다.

군인이 별을 단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인 동시에 고향의 자랑이다. 군인은 많지만 이들 중 스타가 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따는 만큼이나 힘들다. 따라서 군인이 별을 달면 지역민들이 나서 축하한다.

울산은 건국 후 많은 장성들을 배출했다. 그때마다 지역민들은 별을 어깨에 단 그들을 고향으로 초대해 축하해 주었다.

손영길 장군이 별을 달았을 때 울산 유지들은 그를 울산으로 초대해 당시 삼산동에 있었던 울산호텔에서 축하연을 열어 주었다.

이에 비하면 김정헌 장군은 어깨에 별을 3개나 달고 7군단장과 3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교장 등 육군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울산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가 울산을 일찍 떠난 후 자주 울산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는 병영초등학교와 울산제일중을 졸업한 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울산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겨우 병영초와 제일중 동창들뿐이다.

<병영초등학교 100년사>는 ‘자랑스러운 동문’이라는 장에 그의 사진을 올려놓고 ‘제32회 졸업, 동동출생, 울산제일중·울산농고·육사졸업, 육군중장·육군사관학교 교장 역임’이라고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이중 ‘울산농고 졸업’은 잘못된 기록으로 김 장군은 울산농고가 아닌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병영에는 그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심지어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문까지도 ‘학교 시절 경제적으로 가정이 어려웠지만 공부는 대단히 잘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가 어린 시절을 울산에서 보내었던 때는 해방 직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김 장군은 부친이 일찍 타계해 경제적으로 더 힘들었다.

김 장군은 어린 시절 산전샘이 가까운 병영 동사(洞舍) 인근에서 어머니·형과 함께 살았다. 형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특출하게 잘해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일찍 타계했다.

김 장군이 어릴 때 산전마을에는 산전샘과 동사를 지키는 ‘지킴이’가 있었다. 옛날에는 ‘지킴이’를 ‘지기’라고 불렀는데 산전샘 지기는 샘을 청소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이에 비하면 ‘동사지기’는 동사를 청소하고 마을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마을을 돌면서 이를 알리는 일을 주로 했다.

당시만 해도 농촌에는 전화는 물론이고 스피커조차 없다 보니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동지기가 마을을 오가면서 일일이 마을 행사를 큰 소리로 알려야 했다.

김 장군은 1937년 태어났지만 호적에는 1939년생으로 되어 있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초등학교 입학이 늦었다. 김 장군이 병영초등을 졸업하고 울산제일중으로 진학한 때가 1951년이다. 제일중에서도 특출하게 공부를 잘해 김삼도 교장이 학비를 면제해 주는 등 도왔다.

김 장군의 제일중 한해 선배인 권정식 전 제독은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교사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요즘과는 달리 어려운 제자들이 있으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학비를 내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학용품을 사 주는 등 참 스승의 면모를 실천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김 장군이 제일중 졸업 후 유학으로 볼 수 있었던 부산고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실력을 아깝게 여긴 김 교장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장군과 제일중 동문인 최종두 시인은 “우리가 제일중학을 다닐 때 정헌이는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지만 부친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최 시인은 “당시 김삼도 교장이 학비를 내어주고 학용품을 사 주는 등 정헌이를 많이 도와 ‘정헌이가 교장 선생님의 양아들’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김 장군은 제일중 졸업 후 부산으로 가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산고에서도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던 김 장군은 1958년 육사로 진학했고 육사에서도 늘 성적이 뛰어났다. 육사를 다니는 동안 운동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다. 육사 졸업 후에도 골프와 스키 등을 하면서 몸을 단련했다.

육사 18기인 그의 동기생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군인이 있다.

10·26사건 때 김재규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가 육사 동기다. 당시 대령이었던 박씨는 김재규 지시에 따라 대통령 경호실 직원을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가 처형당했다.

허삼수·허화평·김진영과 함께 소위 말하는 신군부가 12·12사태를 일으켰을 때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한 후 조사했던 이학봉도 그의 육사 동기다. 김해 출신으로 경남고로 진학했던 이씨는 1980년 보안사 대공처장으로 5·17 계엄 확대 후 신군부 세력에 맞선 장교들과 정치인들을 체포한 후 조사할 때 총지휘를 맡았다.

1962년 육사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했던 김 장군은 1967년 9월 중대장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15개월간 근무했다. 이때만 해도 월남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나중에 고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에는 그의 부산고 한해 선배 김진영 후임으로 33경비단장이 되었다. 김진영은 33경비단장으로 있을 때 12·12 사태가 일어나자 전두환 장군의 편에 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내는 등 군 실세가 되었다.

1983년에는 대망의 별을 달았다. 이해 울산 출신으로 별을 달았던 장군으로는 김 장군 외에도 차동렬과 권정식이 있다. 삼동초등 21회인 차 장군은 삼동면 출강 출신으로 경남중·고를 거친 육사 16기로 육사로 보면 김 장군의 2년 선배다. 그는 군에서 제2공병여단장 및 제2군 사령부 공병 부장을 거쳐 예편 후에는 현대건설 상무로 가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권 장군은 별을 단 후 제3해역사령관과 해군대학 총장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들 3명은 모두 이해 재경울산향우회에서 선정하는 ‘울산을 빛낸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권 전 제독의 설명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김 장군과 나는 청와대에 진급 신고를 하러 갈 때까지만 해도 동향은 물론이고 김 장군이 나의 제일중 한 해 후배였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진급 신고 후 고향 얘기를 하다 보니 김 장군이 울산 출신인 것을 알았고 더욱이 제일중 한해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대단히 기뻤다”고 말한다.

김 장군은 이후 육군 3사관학교 교장, 7군단장에 이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군인으로서 그의 영광은 육사 교장이 마지막이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조직의 해체를 서둘러 당시 김 장군의 부산고 한 해 선배로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있었던 김진영을 비롯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의 군복을 벗겼다. 이 무렵 김 장군도 육사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대해 전두환·노태우·김복동과 함께 ‘하나회’ 조직에 앞장섰던 손영길 장군은 “하나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군인들이 문제였지 하나회 출신 장교 중에는 평생을 애국 애족의 군인 정신으로 살아온 장교들이 많은데 이들까지 모두 옷을 벗긴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김 장군이 육사교장으로 있을 때는 재경향우회 모임을 육사 운동장에서 개최하는 등 고향 울산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김 장군 주위 사람들은 ”김 장군이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면 김진영 장군 다음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아쉬워한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전역 후 그는 농사에 매달려 원주 제2가나안 농군학교에 입교한 후 1년간 농법을 배웠다. 이후 1년간 충북 괴산으로 들어가 고추와 담배를 직접 심고 가꾸면서 주말에만 가족들이 있는 서울을 오갔다.

1998년에는 가톨릭대학교 부설학교인 교리신학원에 입학했다. 신학원을 다니는 동안 성경 공부와 기도에 힘쓰면서 천주교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가 고엽제 후유증 진단을 받은 때가 2001년이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는 고엽제의 실체를 잘 아는 병원과 의사가 많지 않아 치료 자체가 힘들었다.

2004년 5월에는 그에게 충격을 주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이 있었다. 탄핵 기각 3일 후인 5월18일 그는 탄핵을 기각했던 법관들을 비난하는 유서를 남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죽다 보니 그의 죽음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고 장례식도 조용히 치러져 그의 죽음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장례식 후 그의 시신은 대전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법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군인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육사 동기들이 “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아온 김 장군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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