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일제의 탄압·며느리의 우울증 등 버거운 삶의 무게 짊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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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일제의 탄압·며느리의 우울증 등 버거운 삶의 무게 짊어져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6.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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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동어른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가 살았던 때가 일제강점기로 당시 우리나라 사회지도자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아야 했다. 더욱이 해방 후에는 큰 며느리 덕기의 우울증으로 근심이 많았는데 지금도 근재공 고택에는 덕기가 우울증의 회복을 기대하면서 머물렀던 객사 건물이 사랑채 앞에 있다.

지난주는 명문가인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았던 율동어른 이재락의 삶을 알아보았다. 명당에서 태어났던 그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사회지도자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평생 느끼면서 살다가 타계했다.

그는 인물이 수려하고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에 걸맞은 재산도 갖고 있었다. 인심 또한 후해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가 움직일 때면 고을 전체가 훤했다는 얘기가 유림 사이에는 아직도 전해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태어난 시기가 불행했다.

그는 1886년 태어났는데 이때 조선은 이미 망국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사회지도자들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누어 끝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가 10살이 될 무렵에는 동학혁명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사회가 어수선했고 20살을 갓 넘겼을 때는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미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던 그는 그만큼 망국의 한이 컸을 것이다. 30살이 갓 넘어 고종이 붕어하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간 것도 이런 울분을 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뜻하지 않게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보았다. 그리고는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고향 웅촌으로 와 문중사람에게 남창에서 3·1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이후에도 그는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울산에는 부자가 많았다. 부자 중에는 일제 몰래 독립운동을 벌인 가문도 있지만 박상진 의사를 제외하고는 율동어른만큼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그는 사돈인 심산 김창숙과 함께 힘들었던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군자금 지원만 차단하면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국내 부호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따라서 군자금을 지원한 단체나 개인이 밟혀지면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울산의 경우 독립유공자는 많지만 군자금 지원으로 포상받은 사람은 율동어른을 포함해 겨우 6명뿐이다.

일제강점기 율동어른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었다. 그는 남창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미 이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 밝혀져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구속을 면한 것은 유림사회에서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만약 그를 구속할 경우 남창 일대에서 3·1운동이 더 크게 확산될 것을 일제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때부터 철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남창 3·1운동 후 일제는 아예 주재소 요원 한 명을 근재공 고택에 상주시키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3·1운동 이후에도 그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심산과 함께 영남 일대를 돌았고 때로는 왜경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으로 숨어들은 심산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때마다 주재소 요원의 눈을 피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두 번째 그를 괴롭힌 것은 며느리의 우울증이었다. 율동어른은 동립·동선·동윤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첫째 며느리 덕기는 성균관 대학을 세웠던 심산의 딸이었고, 둘째 며느리 덕남은 대구대학을 창립했던 경주 최부자 집 딸이었다. 둘째 며느리는 족보로 보면 박상진 의사의 처조카다. 박 의사의 부인 최영백은 영록과 영철 두 동생을 두었는데 덕남은 영록의 딸이다. 경주 교동 최부자 집 앞에는 ‘석등이 있는 집’이라는 간판의 찻집이 있다. 이 집에서 덕남은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데 이중 첫째 며느리 덕기는 중년 때부터 우울증을 앓았고 두 번째 며느리 덕남은 오래 살지 못했다. 더욱이 둘째 아들 동선은 율동어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들을 앞세운 그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는 헤아리기가 힘들지 않다.

덕기의 우울증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이와 관련 근재공 고택에는 사랑채 앞에 있는 ‘객사’를 설명하면서 ‘근재공 고택의 객사는 이재락 선생의 며느리이자 심산 김창숙 선생의 딸 덕기에 관한 아픈 이야기가 있다. 이재락 선생의 큰 며느리였던 덕기는 이재락 선생이 일본 순사에 의해 체포되는 장면을 보고 쓰러지고 난 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깨어난 후에도 줄곧 객사에서 지냈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실제로 1926년 2월 군자금 모금을 위해 울산으로 오던 심산은 언양에서 차 사고로 크게 다쳐 입암 손후익 집에서 요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왜경의 추적을 당하자 웅촌에 있던 근재공 고택으로 왔다가 이곳도 안전한 곳이 못 된다 것을 알고 딸 덕기만 보고 다시 다른 곳으로 피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때 덕기는 독립운동을 위해 풍찬노숙하는 친정아버지를 보면서 충격은 받았지만 우울증이 오지는 않았다.

학성이씨 18세 손으로 오랫동안 문중 일을 보면서 최근 <학성세고>(鶴城世稿) 문중 집을 발간했던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은 이와 관련 덕기가 우울증이 온 것이 그가 시아버지 율동어른의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을 때부터라고 말한다.

양반집 외동딸로 율동어른 집에 시집을 왔던 덕기는 시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재판 받을 때 면회하러 갔는데 이때 시아버지가 용수(일제강점기 재판을 받을 때 죄인들에게 씌웠던 고깔)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이때 충격을 받아 우울증이 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부원장은 “더욱이 그때 시아버지가 친정아버지의 군자금 모금을 돕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며느리로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인데 이 때문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우울증이 왔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덕기의 우울증이 남편 동립의 성격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동립은 해방 후 충청남도 문사국장을 지냈는데 이때 대전에서 혼자 기거했다. 동립이 아버지 율동어른을 닮아 성격이 호방해 가정을 돌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부로 어른들을 모시고 홀로 근재공 고택을 지켜야 했던 외로운 환경이 덕기로 하여금 우울증이 올 수 있도록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덕기의 우울증으로 율동어른의 고민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은 며느리를 도솔암에 요양시킨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도솔암은 초기 안화암(安花庵)이라고 불렀는데 이 건물은 의창의 묘실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의창의 아들 죽오가 증축해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기도 했다.

안화암은 나중에 도솔암으로 이름이 바뀌어 암자가 되었는데 암자는 회야댐 남쪽 화장산에 있었다. 율동어른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화장산 일대에는 율동어른의 전답이 많아 이 전답을 다 둘러보려면 하루가 부족하다고 말을 하곤했다.

우울증 초기에만 해도 덕기는 도솔암에서 요양을 하면서 병세가 좋아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병세가 나아지는 기미가 없자 집으로 와 객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덕기는 우울증을 앓았지만 당시로는 장수라 할 수 있는 75세까지 살았다. 이에 비하면 둘째 아들 동선은 36세에 타계해 율동어른보다 5년 먼저 세상을 하직했으니 불효를 한 셈이다. 동선의 부인 덕남 역시 남편이 타계한 후 얼마 살지 못하고 43세에 눈을 감고 말았다. 둘은 부부생활을 오래하지 못했지만 1남 5녀를 두었다. 덕남은 친정에서 배워온 술 솜씨가 뛰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면 술을 잘 담아 문중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6명의 자녀 중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외갓집인 경주 최부자 집으로 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딸들은 출가도 경주에서 했는데 다행히 모두 시집을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율동어른에게 6·25는 또 다른 고통을 주었다. 6·25가 일어나면서 율동어른 집에서 가까운 대운산에는 빨치산들이 주둔하게 되는데 이들 빨치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율동어른 집으로 몰려와 재산을 내어놓으라면서 협박하는 바람에 피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온몸을 바쳤던 율동어른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했던 동족의 협박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피신했던 곳이 부산 동구 좌천동에 있던 능풍장(陵風莊)이었다. 능풍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거상 오이케 츄스케의 별장이었는데 해방 후 비어있던 이 집을 사들여 이사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1938년 발행된 <부산안내도>는 능풍장이 고관 공원 옆에 있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능풍장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부산 동구 좌천동 수정초등학교 동편에 있었는데 좌천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철거되었다.

이 별장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지금도 좌천동 일대에는 거리 명을 ‘능풍장 1길’ ‘능풍장 2길’이라고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

율동어른에게 좌천동은 객지였지만 이 집에 사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을 모아 시조회를 열었고 때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이시영 부통령을 만나기 위해 부산 서구 부민동 관사로 가기도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6·25로 인해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피난 와 있었다. 율동어른의 자녀들은 모두 타계했지만 주손 유환은 구순으로 아직 서울 변두리에서 살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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