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역 강제징용 피해자 안봉상(99)씨, “사과 받으면 좋겠지만 인자 우야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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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강제징용 피해자 안봉상(99)씨, “사과 받으면 좋겠지만 인자 우야겠노”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3.03.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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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인 안봉상씨가 일본 징용시절의 자신의 사진을 들어보이며 고된 강제노동에 시달린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우야겠는교. 사죄를 받으면 좋겠지만…그래도 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산지역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한 명인 안봉상(99·울산 남구 무거동)씨는 1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윤석열 정부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에 대한 방식을 ‘제3자 변제’로 추진키로 한 것과 관련, 이렇게 밝혔다.

5년 전 본보와 인터뷰(본보 2018년 11월14일자 3면) 후 다시 만난 그는 노화로 귀가 잘 안들리고 몸도 불편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와 관련해서는 또렷이 기억을 했다.

‘제3자 변제’ 방식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듣는다는 안씨는 “우야겠노”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면서 “사죄를 받으면 좋겠지만…안해주니…참”이라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그는 “그래도 이제는(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강제징용 피해자 입장에서는 온전히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일본의 사죄 또한 받아야 하지만, 미래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개인적 입장을 피력한 셈이다.

다만 안씨의 아들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만일 충분히 배상 받았다면 지금의 방식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태어난 안씨는 스물두살이던 1944년 8월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행 배를 탔다. 그길로 이역만리에서 1년여간 갖은 고초를 겪었던 기억은 약 80년이 다 된 지금도 생생하다.

안씨는 “(범서)면사무소에서 무조건 오라고 해서 갔는데 영문도 모른채 갔다. 신복마을에서는 나 혼자 였다. 울산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간 뒤 다시 전국에서 모인 징용자들과 함께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24시간을 꼬박 가니까 일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오사카 지역의 조선소 인부들을 위한 숙소였다. 경상도와 전라도 등 전국에서 끌려온 6000여명이 이 곳 숙소에 묵었는데, 한 방에 17명씩 배정돼 함께 생활했다.

안씨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내가 묵은 곳은 1층 11호실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하도 싸우니까 결국 일본 관리자들이 나중에는 경상도·전라도 사람들을 분리해서 다른 숙소에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오사카 인근 한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작업 중 선체 조립 공정에 투입됐다. 소학교도 제대로 안 다니고 10대 때부터 농사말고는 해 본 일이 없었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생전 처음 배 만드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해뜨면 조선소로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해지면 숙소로 오는 고된 생활이 반복됐다”고 회고했다. 그가 이렇게 일하면서 받은 임금은 하루 2원 1전(당시 쌀 한 가마니(80㎏) 평균 5원, 1원=4만원 가량)이었고, 식대로 하루 34전을 받았다.

안씨는 “아침 저녁이 주먹보다 작은 양이었다. 이 또한 강냉이(옥수수)나 콩, 고구마 갈은 것 등이 대부분이어서 힘든 노동에 항상 배가 고팠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안씨의 첫 딸이 태어났고, 편지를 통해서 그 소식을 접했다.

1년 뒤 일본의 항복으로 안씨도 고국에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도 바로 귀국하지 못했고, 3개월이 지난 그 해 11월께 징용자 200명과 일본 현지에서 살던 한국인 250명 등 450명이 함께 목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라 내해와 구주(규슈)를 거쳐 우여곡절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안씨는 “오는 과정에서 그 동안 모은 돈 200원(현재 약 800만원)을 다 썼고 한국에 왔을 때는 한 푼 도 없었다”고 했다.

안씨는 1년 3개월여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고, 부인 등 가족과 재회했다. 이후 아들 3명 등을 더 낳아 총 3남3녀의 자식을 둔 안씨는 손자 11명에 증손자까지 둔 상수(上壽)의 노인이 됐으나 여전히 그때의 기억은 잊지 못한다.

안씨는 “죽기 전에 나 같은 피해자를 꼭 한 번 만나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밝혔다.

한편 울산에는 지난 2005~2008년 과거사위원회와 울산시 등의 전수 조사결과, 강제징용 피해자가 총 2162명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고, 현재 생존자는 안씨를 포함해 1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차형석기자 stevech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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