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권덕하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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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권덕하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
  • 경상일보
  • 승인 2023.03.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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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다문다문 심은 산골에서 청 노루귀 꽃 만나 누군가 했다 꽃대에 곱게 이는 솜털 보고 들숨소리 들은 듯했다 바위에 비친 그림자도 낯익어

언젠가 가까이 다가가 오래 바라본 것 같았다 수저 같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간 멧새 배고픈 눈빛 함께 견디다

그리운 이 눈빛까지 서편 하늘에 묻을 수 없어 벼룻길을 걸어 돌아오다 노을 타는 강 물결에 눈시울 뜨거워졌는데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며, 환청도 난청도 다 꽃의 일이라며, 노루귀 꽃 고요의 바람결이 내 귀를 꽃이라 부르는 저녁

불면의 어둠 산밭에 부리고 이른 귀잠에 들려는 내가, 이제 누구인가 싶다

 

햇살과 바람이 머무는 꽃처럼 고요하게 듣는 ‘귀’

노루의 귀를 닮아 노루귀이다. ‘햇살 다문다문 심은’이란 표현처럼 이른 봄 양지쪽에 피는, 가느다란 꽃대에 보송보송 솜털이 고운 꽃이다.

이 시에는 노루귀처럼 귀와 관련된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들숨소리, 환청, 난청, 그리고 귀잠. 귀잠은 깊이 든 잠을 말하는데 왜 그런 곤한 잠에 귀잠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무엇보다 귀를 꽃이라 부른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귀는 식물성이다’라는 취지로 말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귀의 생김새가 꽃 같기도 하다. 귀는 공격적이지 않다. 귀는 모든 걸 받아들인다. 귀에는 소리가, 꽃에는 햇살과 바람과 빗물이 머물다 간다. 청각은 가장 늦게까지 남아 삶의 마지막은 고요한 식물을 닮았다. 노루귀꽃 건너온 바람이 내 귀를 꽃이라 부른다면, 노루귀꽃과 나는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일 게다. 꽃잎이 쫑긋쫑긋 벙그는 소리, 솜털이 가만가만 바람을 빗질하는 소리. 가까이 다가가 노루귀꽃 오래 바라보듯, 귀는 오래, 곰곰이 소리를 듣는다. 고요의 소리다. 귀잠에 들만하다.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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