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성대 앞 나무의자에 앉아 있다 비단벌레차를 기다린다 온다는 시간 지났다 나는 매표원에게 항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다려본 지 오래다 기다리는 동안 계림의 황금 가을이 나에게 온다 아름다운 호사다 비단벌레차가 천년 전에 출발했든 천년 후에 도착하든 조급하지 마라 신라가 나에게 오는 데 천년이 걸렸다 오늘 내게 중요한 것은 너를 기다리는 일 내 손에 탑승권이 있으니 만족한다 비단벌레차가 오고 있나 보다 황남동 쪽 어디에서 푸른 사랑의 섬광* 번쩍하며 눈부처로 내려앉는다
*최동호 시인의 시 ‘불꽃 비단벌레의 사랑’에서 빌림.
기다리는 일, 그 자체의 기쁨에 대해 생각하다
계림의 황금 가을이 배경인 이 시를 지금 꺼내 드니, 시에 등장하는 1000년의 기다림을 생각하면 필자는 너무 조급한 셈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장식물로 이용되어온 비단벌레의 아름다운 연둣빛 날개는 녹옥의 여름과 썩 어울린다. 신라의 고분에서도 비단벌레를 이용한 장식품이 많이 발견되어, 경주에서는 비단벌레를 관람차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다.

시인은 첨성대 앞에서 늦어지는 비단벌레차를 기다리며 기다림의 미학에 대해 생각한다. 더디 옴에 조급해하지 않고 ‘신라가 나에게 오는 데 천년이 걸렸다’면서 느리고 빠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달관의 자세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너를 기다리는 일’ 그 자체이다. 기다리는 것은 과정이다. 생략하거나 건너뛰지 않고 오롯이 견디는 일이다. 아니, 견디는 게 아니다. 기다림은 설렘이고 두근거림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 말마따나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기쁠’테니까.
그러므로 기다리는 대상이 있다는 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매미는 지상에서의 2주 정도 삶을 위해 7년을 기다리고 비단벌레도 4년을 기다린다. 만남의 희열은 ‘섬광’과 같이 지나가니, 오히려 기다림의 두근거림에 느긋하게 몸을 맡겨도 좋으리.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