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소화가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다. 장마 속에서 줄기는 더욱 힘차게 뻗어올라 담을 넘어 이웃 골목을 내려다 보고 있다. 능소화(凌花)는 ‘업신여길 능’ ‘하늘 소’자를 쓴다. 풀어보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꽃 중의 꽃, 아니면 땡볕을 견디는 꽃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실제 대부분의 꽃은 열흘을 못넘기는데, 능소화는 땡볕 속에서도 한여름을 거뜬히 견딘다. 한 때는 능소화 꽃가루에 독이 있어 눈에 들어가면 큰 일 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모양이 트럼펫을 닮았다고 해서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어느 궁녀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 구중궁궐의 궁녀 ‘소화’는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성은을 입고 빈에 올랐다. 성은을 입고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임금은 한번도 소화를 찾지 않았다. 시기와 음모 속에서 소화는 결국 죽고 말았다. 소화는 유언대로 담장밑에 묻혔고 그 자리에서 능소화가 피었다. 소화는 더 높이 더 멀리 임금을 보기 위해 하늘 끝까지 피어올랐다.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능소화’ 일부(이원규)
능소화는 중국에서는 등나무와 닮았다고 해서 ‘금등화(金藤花)’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양반들이 이 나무를 아주 좋아해서 ‘양반꽃’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굳은 기개를 지녔다고 해서 어사화로 사용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사대부들은 능소화를 입신양명의 상징으로 삼았고 일반 가정에서는 함부로 키우지 못하게 했다. 이를 어길 땐 곤장까지 쳤다고 한다.
능소화는 한번 피기 시작하면 초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특히 사찰 담장이나 가정집 정원에서 잘 자란다. 능소화 명소로는 전북 진안 마이산 탑사 능소화를 꼽을 수 있다. 탑사 뒤 암마이봉에는 능소화가 절벽을 타고 35m까지 자라 매년 1만여 송이의 꽃을 피워낸다. 탑사에서 능소화를 심은 것은 1985년이라고 한다. 트럼펫 같이 생긴 능소화가 화무십일홍을 비웃으며 여름의 담장을 붉은 색으로 뒤덮고 있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