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를 끊고 나서 김재성 노인의 기록을 다시 들추어 보았다. 분명 자신의 아내는 이름이 김순조이고 에리코란 여자를 백련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들도 같이 갔었다고 적혀 있었다. 에리코란 여자에게 빠져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그런데 김재성 노인의 아내였던 김순조란 여인이 큰 집인 김인후의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았던 이유도 궁금했다. 정말로 일본인 순사와 바람을 피웠던 사실이 부끄러워 스스로 잠적을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내가 차를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무슨 고민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의 손을 잡아 옆 자리에 앉게 했다. 아내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늘 보아오던 얼굴이라 이마의 주름이나 쳐진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예전 처녀적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가는 세월이 너무 빨라 현기증이 느껴지는군.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요?”
“갑자기가 아니야. 세월이 쏜살같다는 게 실감이 나.”
나는 K의 주검에 대해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그가 나와 동갑이었으며 20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하얀 얼굴과 깊은 볼우물에 관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는 시인의 아내라는 사실 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 세 사람이 반곡천에 자연장을 치르러갈 것이라고 했더니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아내의 동행을 거절했다. 아내는 더 이상 동행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내일 오후에 대곡박물관에서 열릴 일본화가의 전시회에 찾아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은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도 마음속이 복잡했다. 김재성 노인의 일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히는데다 김동휘의 변해 버린 얼굴이 천정에서 맴돌았다. 내일이면 정말 K를 사막으로 보내는 날이었다. 최초의 사막은 호주의 사막이 아니었다. 사막은 실상이 없는 곳이었다. 사막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메마른 가슴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최초에 사막을 불러온 것은 나였다.
아침 9시에 태화교 남쪽 하부주차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김은경 시인은 경주에서 왔고 김동휘는 동생집이 있는 덕하에서 왔다. 두 사람 모두 가벼운 등산복 차림이었다. 유골은 등산배낭에 넣어왔다. 유골이 든 배낭을 조수석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은 뒷좌석에 탔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도 가끔씩 배낭에 눈길을 주었다. K가 배낭에서 툭 튀어나와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