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14)]겨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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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내의 초록지문(14)]겨울눈
  • 경상일보
  • 승인 2025.02.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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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날 선 바람이 피부를 파고든다.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 아릿한 감각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입춘 추위는 왔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 ‘입춘에 장독 깨진다’는 속담이 괜한 말은 아닌가 보다. 아파트 화단에서 봄을 준비하던 백목련의 꽃눈도 놀랐는지 은빛 솜털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다.

겨울은 식물에 특히 가혹하다.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냉이, 달맞이꽃 같은 로제트 식물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체온을 낮춘다. 씨앗이나 뿌리만 남기는 방식으로 내년을 기약하기도 한다. 나무는 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잎을 떨구고 물기를 말린다.

휴면 중인 나무를 살피면 잎이 떨어진 자리나 가지 끝에 무언가 오돌토돌 돋은 것을 볼 수 있다. 겨울눈이다. 동글동글한 꽃눈과 뾰족한 잎눈은 내년 봄에 틔울 꽃과 잎에 대한 정보가 압축된 압축파일과 같다.

나무는 이듬해를 위해 꽃이 지는 늦봄부터 눈을 만들기 시작한다. 햇살과 바람, 비를 차곡차곡 저장한 후 비늘잎과 솜털, 방수 물질을 덮어 보호한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이 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덕분에 겨울눈의 위치와 배열을 보면 이듬해 수형을 가늠할 수 있으며, 생김새는 잎이 없는 겨울철 수종 분류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은빛 솜털로 감싼 백목련 꽃눈.
▲ 은빛 솜털로 감싼 백목련 꽃눈.

겨울눈은 일정표다. 나무는 꽃을 먼저 피울지, 싹을 먼저 틔울지,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지까지 미리 정해둔다. 마치 일어나서 잠드는 순간까지 빼곡하게 적었던 어릴 적 생활 계획표 같다. 비좁은 겨울눈에 가지런히 앉은 여린 잎들은 지금쯤 호명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기대감이 가득하지 않을까.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치 출석이라도 부른 듯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백목련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막바지 시련 속에서 묵언수행 중이다. 나는?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삶은 아닐까. 다가올 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준비하며 성장하는 삶이기를 빌어본다. 바람이 날카롭다. 그래도 햇살만큼은 입춘이라는 이름처럼 온화한 오후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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