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모국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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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모국어부터
  • 경상일보
  • 승인 2025.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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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아 화진초 교사

나는 80년대생으로, 9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영어 학원을 많이 다니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영어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당연히 내 모국어인 한국어가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 훨씬 편하다.

그런데 요즘 2000년대생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모국어인 한국어만큼 또는 한국어보다 더 영어를 접하며 자란다. 영어 유치원이라고 불리는 영어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종일 영어에 노출되어 지낸다. 영어 말소리에 노출되는 것뿐만 아니라 영어쓰기를 위해 알파벳을 배우고 문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런 덕인지 영어유치원을 다닌 아이들은 만 4세, 만 5세만 되어도 영어로 글짓기를 할 수 있고 영어를 쓰는 원어민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다. 이런 가시적 효과 때문에 영어를 빨리 노출하려는 부모들이 많다. 교실에서도 그 아이들은 확연히 티가 난다. 알파벳도 모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기 이름을 영어로 쓰기도 하고, 일기를 써오라니 영어로 일기를 써오기도 하니 티가 날 수밖에.

하지만 언제나 기회비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국어 습득이 한창 일어날 유아 시기에 영어를 접하니, 모국어에 흠뻑 노출되는 아이들보다 모국어 발달이 지연되는 가능성이 있다. 또한, 영어와 모국어를 섞어 쓰는 현상이 많아지면 모국어 문장구조가 영어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Myers-Scotton, 2002). 실제로 영어로 일기까지 써낼 수 있는 아이에게 한글로 일기를 써오라고 하니, 영어 번역 투의 문장으로 일기를 써오기도 했다. 또한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영어단어는 떠올리면서도, 적절한 모국어는 떠올리지 못해 뭉뚱그려 대충 한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리다 보니, 영어와 모국어가 혼동되면서 경계선이 사라지기도 하고, 모국어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릴수록 다른 아이들이 하지 못하는 영어를 빨리 시작하면 특출나 보이지만, 모국어의 빈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아 시기에는 무엇보다 많은 독서와 선생님, 부모님 등 많은 사람과의 대화로 모국어를 사용하는 맥락을 배워야 하고 많은 어휘에 노출되며 논리적으로 제 생각을 말하는 방법을 깨쳐야 한다. 한글을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을 정확히 발음하고, 초성·중성·종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모국어 소리에 충분히 노출된 이후에는 쓰기를 위한 한글 자모음을 배우고 소릿값을 조합해 글자를 읽어내고 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모국어는 가만히 있으면 일상에서 자연스레 채워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모국어 역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체계적으로 습득해야 한다.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국어는 사고의 기반이 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다. 따라서 아이들이 모국어를 기반으로 영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모국어가 튼튼한 기반 위에 자리 잡을 때, 외국어 학습도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아 시기에 반짝 눈에 띄는 영어 실력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아이의 언어적, 인지적 발달을 고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보아 화진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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