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국적의 A씨는 지난해 울산의 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가 진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을 나왔다. 진료를 요청했지만, 의사와 대화는커녕 진단을 위한 검사지조차 번역본이 없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통역사를 수소문해 다시 병원을 찾았지만, 감정 상태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늘면서 울산 의료기관에도 외국인 환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상담이 주가 되는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여전히 언어 장벽이 높다. 최근에는 남구나 동구 등 기업체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주민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신과 진료에 필요한 전문 통역인력은 부족하다.
현행 시스템은 외국인 주민이 병원을 찾으면 필요시 구·군 가족센터 등을 통해 통역사를 연계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내과나 산부인과 진료에는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지만, 정신건강 진료는 얘기가 다르다. 감정 표현과 사고 흐름, 문화적 배경까지 이해해야 하므로 단순 회화 통역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특히 정신과에서는 우울증, 자살 충동 등을 판단하기 위한 각종 척도 검사를 활용하는데 대부분의 검사지가 한국어로만 제공된다. 한국어에는 있지만 외국어에는 없는 개념이나 뉘앙스를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며 이로 인해 정확한 진단이 어렵다.
이에 울산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와 동구정신건강복지센터는 지난해 협약을 맺고, 외국인을 위한 정신건강 척도 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지난 1월부터 본격적인 검사지 제작에 들어간 이 사업은 지난 2월 완성본을 센터에 전달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번역 대상은 △우울증 자가척도 △자살생각 척도 △지각된 스트레스 척도 등 총 3종이다. 영어·중국어·러시아어·몽골어·필리핀어·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캄보디아어·한국어 등 9개 언어로 제작됐다.
동구정신건강복지센터는 해당 검사지를 바탕으로 외국인 주민이 자가 검진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정신건강 셀프 체크 프로그램’을 구축 중이다.
센터는 홈페이지 개편시 외국인 전용 탭을 신설해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검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연내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 운영은 내년으로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척도지는 외국인 주민들이 스스로 상태를 점검해 보는 데 초점을 맞춘 자료로 의료기관에서의 정식 진단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아직 임상적 근거가 부족하다.
센터 측은 번역 도구들이 일차적 판단 자료로 쓰이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향후 외국인 진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홍보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동구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통역사 확보가 어렵고 문화적 장벽도 있다 보니 외국인 주민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가 진단은 그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첫 단계이며 이후 검진 결과가 상담이나 치료 연계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김은정기자 k2129173@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