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 오영수 선생 사신 기록물 분석 자료 공개]문체론·문단교유 양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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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오영수 선생 사신 기록물 분석 자료 공개]문체론·문단교유 양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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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영수 선생의 서울 우이동 사신 기록물.
난계 오영수 선생은 그의 나이 만 43세이던 1951년에 부산의 중학교 교사 시절 부산 동구 수정동에 거주하면서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다. 이후 1954년에 ‘현대문학’의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 1955년에 상경을 하게 된다. 그는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다 1966년에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어 쌍문동을 거쳐 1974년에 울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하기까지 약 20년간 서울 생활을 하며 여러 통의 사신 기록물을 남겼다.

난계는 우이동에서 총 4통의 사신 기록물을 남겼는데, 이 중 두 통은 발신연대가 1966~1974년으로 추정이 가능했지만, 두 통은 발신 연대 추정이 불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네 통의 사신들은 집안 공사, 안부 인사, 수상 기념 인사 등의 내용이었다.

사신 ‘우이동 1’에서 난계는 “좋은 날씨입니다. 별고 없죠? 이번에 ㅇㅇ한 염려(念廬) 감사(感謝)합니다. 퍽 요긴했읍니다. 조그만은 家設을 근 한 달 전부터 하고 있듭니다. 마치고 기별하겠읍니다. 한 번 오십소.(꽃이 피기 시작했읍니다) 내내 총총 우이동 오생 조연현 형(牛耳洞 吳生 趙演鉉 兄)”이라고 적었다.

박종석 평론가는 “오영수 자신의 집안을 새롭게 단장하면서까지 소식을 전하는 내용으로 보아 조연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사신을 보면 사무적인 서열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난계는 ‘현대문학’ 편집장 이전부터 조연현이 주간으로 있었던 ‘문예’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신 ‘우이동 2’에서 난계는 “積阻(적조)했읍니다. 별일 없으시죠. ㅇㅇㅇㅇ해 겹벚꽃이 한 무렵이겠읍니다. 소풍 겸 한번 나오십소. 한번 볼만합니다.(日曜日은 너무 번잡해서 피(避)하시고)”라고 썼다.

박 평론가는 “사신에서 언급된 겹벚꽃은 자연이요, 자연은 오영수의 삶과 문학에 필연적인 관계로 보인다. 이 또한 그의 작품과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라며 “인간적인 유대 관계에서 벚꽃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자연 탐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단문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음은 그의 단편 소설의 문체론적 특징을 볼 수 있는 연구 또한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기타 사신 기록물로는 3통의 사신을 남겼는데, 이 중 ‘사신 1’에는 “오늘 원고(原稿) 보았읍니다. ㅇㅇ히 가셨다기 맘이 놓입니다…來日 떠났기에 불야불야 이 글을 적읍니다. 兄이 계시던 집에 편지가 와 있기에 개봉(開封)해 보냅니다.”라고 적혀있다.

박 평론가는 “난계가 ‘현대문학’ 편집장으로서 수많은 문인과 교유(交遊)를 짐작케 하는 사신”이라며 “구체적으로 어느 문인과 교유했는지 파악은 어려우나 김구용, 이한직 등이 거명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이의 일화 정도는 남았으리라는 정도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 사신을 통해 “오영수와 관계된 문단 주변을 파악할 수 있고, 문단 파동 사건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사신이다”라고 덧붙였다.

차형석기자 stevech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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