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18)]수국은 오픈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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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내의 초록지문(18)]수국은 오픈북이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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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오솔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산호초 사이를 헤집는 열대어처럼 움직임이 가볍다. 초여름 햇살은 꽃잎에 앉아 일렁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미소가 흐드러진 곳, 장생포의 여름은 수국과 함께 시작된다.

수국은 장마와 함께 온다. 물을 좋아해 물 수(水)에 국화 국(菊)을 이름으로 쓰니 어련할까. 옛 어른들은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 둥근 꽃이란 뜻으로 수구(繡球)라 부르기도 했다. 축제 초반이라 만개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자연이 그린 그림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색색의 꽃망울이 담긴 초록 캔버스 사이에서 사람들이 만드는 웃음이 하늘로 퍼진다.

어떤 식물들은 특정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구 건강을 위한 센서 역할을 하는 지표식물이다. 덕분에 이들이 뿌리내린 지역의 생태와 환경 상태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산화황에 민감한 소나무, 오존에 민감한 상추, 중금속에 민감한 벼처럼 꽃을 통해 흙의 상태를 알려주는 수국 또한 지표식물이다. 산성 토양에서 파란색을, Ph가 올라갈수록 보라색, 자주색을 거쳐 짙은 분홍색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한 식물체 내에서도 뿌리의 위치나 수분 흡수, 시간 경과에 따라 색이 변할 때도 있다. 꽃말이 ‘변덕’ ‘냉담’ ‘변심’인 까닭도 어쩌면 그 변화무쌍함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 장생포 수국.
▲ 장생포 수국. - 막 피기 시작하는 꽃은 초록을 품은 흰빛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색이 변한다. 델피니딘 색소와 토양에서 흡수한 알루미늄 이온이 결합하며 생기는 변화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을 은유적으로 말할 때 ‘오픈북(open book)’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수국은 오픈북이다. 내면의 변화가 꽃잎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난다. 가식이 없는 수국을 통해 나를 들여다본다. 일상에서 마음을 내놓기 주저하는 때가 많다. 적당한 미소와 말투를 고르는 일이 거듭되면 지치기도 한다. 지금 이곳에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사람들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수국을 찾아오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꽃잎 하나하나에 담긴 진심의 농도일지도.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이다. 작은 꽃잎들이 모여 만든 폭죽이 터질 준비를 한다. 6월 장생포에서는 꽃을 착즙기에 넣어 즙으로 마시지 않더라도 저절로 수국 같은 마음이 된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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