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4년 10월 2일(음력) 아침, 의병장 이눌 장군이 보낸 전서구가 동굴로 날아들었다. 지난 2월 29일(음력)에 이장군 휘하의 의병들과 함께 화담에서 왜군 백여 명을 척살한 이후 오랜만의 부름이었다.
청안이가로 자는 희인(希仁), 호는 약우(若愚)인 이눌 장군은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노비와 가솔들을 모아서 천사장의 깃발 아래 의병군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그의 통솔력과 인품에 반해서 휘하에 많은 의병군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경주문천에서 있었던 문천회맹에 참석하였고, 1592년 6월에는 김득복 장군과 경주 금오산에서 적병 400여 명을 척살하고 조총 등의 병기 27점을 노획하였다. 1592년 7월에는 영천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592년 8월과 9월에는 경주성 탈환전투에도 참여하였다.
1593년 2월6일(음력)에는 울산과 경주의 의병연합군이 태화강 전투에서 수천의 적병을 죽이는 대승리를 하였다. 의병군은 1월28일 태화강 하류에 나타난 대규모 적선을 보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상호 연락하니, 울산과 경주지역에 있는 의병군이 대부분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였다.
때가 북동풍이 부는 겨울철이라서 의병연합군은 화공을 준비하였다. 숯과 산초나무, 짚 등을 넉넉히 준비한 후 십여 척의 선단에 불을 붙여서 적선에 도달하게 하고, 강가에 접안해 있던 적선에게는 직접 화공을 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염포 쪽의 강가에 많은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화공을 할 수 있게 준비를 한 후에 태화강 가에 삼천여 병력을 적절히 배치하고 북동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사나흘 잠잠하던 울산에 마침내 북동풍이 불었다. 의병군들은 먼저 미리 준비해둔 떡쌀가루처럼 고운 모래를 바람에 날려서 적선들의 시야를 가린 후에 강 하류에 머물며 조선군과 대치하고 있던 수십 척의 왜선에 일제히 화공을 하였다. 염포에 숨어있던 의병군들은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서 강중으로 던지고, 미리 만들어 놓은 선단에 불을 붙여서 적선 쪽으로 보내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였다. 이에 적병들은 놀라서 우왕좌왕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천에 달하였다.
마치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이 전투에서 의병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울산과 경주지역의 의병장은 이눌, 서인충, 이여랑, 이응춘, 최봉천, 윤홍명, 장희춘, 박손, 박문, 이장수, 이삼한, 김응하, 박인국, 김광복, 김응탁, 김득복, 유백춘, 유영춘, 김합, 유정, 이언춘 등이었다.
천동은 그동안 이눌 장군의 부름으로 왜적과 전투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의병군과 함께 죽인 왜적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임진년인 1592년 6월15일(음력) 밤에 석읍동에 침입한 적을 대파하여 적병 칠십여 명을 사살했고, 그해 7월5일(음력) 낮에는 백율산 아래서 적병 오십여 명을 척살했으며, 10월6일(음력) 저녁에 나아곡에서 적병 오십여 명을 역시 참(斬)하였다. 1594년 7월3일(음력)에 천사장(天使將) 이눌 장군이 백운제, 권응수 군대와 연합해 창엄에서 적병 천여 명을 척살하였을 때도 전투에 참여했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