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란이 일어나고 조선군과 왜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은 보부상단에 있는 대산형님을 통해서 들었으나 그는 큰 관심이 없었다. 동래에 왜군이 상륙한 지 불과 나흘 만에 경주성이 함락되었을 때도 어차피 그건 사람들 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천한 신분은 왜왕이 지배하는 세상이든 조선의 왕과 사대부가 지배하는 세상이든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왜병들은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고, 여인들을 겁탈하고 강제로 끌고 갔다.
어릴 적 동무였던 거지 움막의 달래도 그렇게 왜병들에게 윤간당하고 끌려가서 소식이 없게 되자, 그는 동대산을 거점으로 천사장 깃발을 앞세우고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이눌 장군을 찾아갔었다. 그 당시 장군은 자신이 부리던 하인과 백정 등 천민들을 의병으로 사용하고 승군도 조직했다.
나라의 위기 앞에 양민과 천민의 구별이 불필요하며 누구든지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적들과 싸울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함께 참여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열린 생각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천동은 장군 앞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솔직히 왜 저같이 천한 백정이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막연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참여할까 합니다. 하지만 일반 의병들과 같이하는 집단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단신으로 적의 후미에 침투하여 적병을 척살하는 임무를 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정이라는 천민이 자신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는 괘씸함보다 녀석의 행동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는 천동을 보며 말했다.
“네 재주를 보고 판단하겠다.”
그렇게 해서 천동은 장군 앞에서 무예시범을 보이게 되었고, 장군은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이눌 장군은 여느 양반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으며,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장군과 천동은 그들만의 비밀스런 맹약을 했다.
이눌 장군의 눈에 비친 천동의 모습은 사대부의 자제들에게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6척 장신의 건장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눈매하며 생긴 것이 영락없는 장군감이었다.
천동이 지니고 다니는 검은 임진년 정월에 그의 양부나 다름없는 마루아저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한 달 동안 정성을 들여서 만든 것이다. 마루아저씨는 그가 일곱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자 그를 돌봐 주었던 아버지의 친구로, 모화지방의 토호인 박대감이 사적으로 운영하던 원원사 밑에 있는 대장간이 그가 일하던 곳이었다.
천동이 고아가 된 이유가 이웃 마을의 초시 김응석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양반 세도가를 친척으로 둔 자이기에 대장장이 마루는 나이 어린 천동에게 어떤 이야기도 해줄 수 없었다. 천동의 부모가 그에게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의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김 초시는 마치 파리 한 마리 때려잡듯이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