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사계절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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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사계절의 사나이
  • 경상일보
  • 승인 2021.05.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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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소신 없이 지시에만 따르는 사람을 영혼이 없다고 비하하기도 한다. 무소신을 넘어 사익을 위해 공적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직업적 양심에 대한 배반이다. LH 투기 사례처럼 직무상 취득한 정보나 권한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행태는 파렴치하다. 이와 반대로 신념을 지키면서 양심을 속이지 않고 영혼(!) 있는 행동을 하는 인간의 모습은 현실에서건 영화에서건 감동을 준다. ‘사계절의 사나이’는 이상적 공영사회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에 관한 영화다. 1966년 개봉돼 아카데미상을 받은 수작으로 감명깊었던 기억에 다시 보게 되었다. 제목은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 자세의 사람’ 또는 ‘굳은 신념으로 모든 계절에 어울리는 만능의 사나이’라는 은유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법률가인 토마스 모어는 철학 문학 신학 외교학 등 통합 학문의 대가였으니 지적 교우인 <우신예찬>의 저자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가 붙여 주었다는 ‘사계절의 사나이’가 어울린다. 법률가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린다.

16세기 절대 왕정시대 영국 튜더 왕조의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청으로부터 허락받고자 했다. 남계 왕통의 승계자를 얻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젊은 앤 볼린을 왕비로 맞아 들이고자 했으나 교황청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형수였던 미망인 캐서린 왕비와 혼인하고자 국익을 내세워 특사까지 보내어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이혼을 허락받으려던 것이었으니 어쩌랴.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신임으로 대법관(Lord Chancellor)에 임명된 왕의 친구이자 조력자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의 적법함을 인정하는 법리를 계발하고 국왕이 교회 수장을 겸하는 수장령을 선포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신의 이혼을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모든 신민에게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는 선서의무를 부담시키는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헨리 8세는 뛰어난 덕성으로 존경받는 토머스 모어의 지지를 받고 싶어했다. 자신이 만든 법률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인, 정치인, 법률가가 왕의 뜻에 따랐지만 토마스 모어는 협력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선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언약이기 에 선서를 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언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선서의무를 행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양심에 반한다는 것이다. 헨리 8세는 기대를 저버린 토마스 모어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토마스 모어는 반역죄로 체포돼 1년 이상 런던탑에 구금되어 온갖 협박과 회유, 유혹을 받았지만 뿌리치고 모함과 위증에 의한 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된다. 400년 지난 이후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영화 중 공직자의 양심에 관한 대화가 인상적이다. 헨리 8세의 이혼에 대한 허락을 교황청으로부터 받도록 도와달라는 대법관인 울지 추기경의 부탁에 추밀원 의원인 토마스 모어는 반대한다. 울지 추기경이 “의원인 자네가 사사로운 양심만 들먹이며 내가 하려는 일을 막을 생각인가”라고 하자, 토머스 모어는 “정치가가 공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머지 않아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라고 답한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사사로운 양심이 살아 있어야 나라가 바로 된다는 의미다. 울지 추기경은 자신에게 반대했지만 후임으로 토마스 모어를 대법관에 추천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물질과 사욕이 앞서고 위선이 횡행하는 염량세태에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행동은 정의롭다. 신념을 지키고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희생은 숭고하다.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용기는 바로 사사로운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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