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8)]복원된 도시,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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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58)]복원된 도시, 바르샤바
  • 정명숙 기자
  • 승인 2021.06.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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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강렬하게 쏟아지는 태양이 짙은 녹음으로 풍경화를 그려내는 8월의 바르샤바. 결코 우중충하거나 허름하지 않은 고건축들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거리에 붉은 꽃들이 정갈하게 가로풍경을 수놓는다. 프라하만큼 고색창연하지도 않고, 부다페스트만큼 우람하지도 않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가로풍경은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순백색의 드레스와 화사한 꽃무늬 조끼, 화관을 쓴 처녀들의 흥겨운 군무를 연상케 한다. 쇼팽의 폴로네이즈(polonaise)가 어울리는 도시풍경이다.

그 화사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난과 질곡의 역사를 생각하며 구도심으로 향한다. 비 라틴계 동유럽 국가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폴란드만큼 비참한 침탈의 수난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17세기 스웨덴의 침입, 18세기 프로이센의 지배, 19세기 나폴레옹의 침공에 이은 러시아의 지배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강대국으로부터 침탈을 당해왔다. 더구나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은 도시의 80%를 괴멸시키는 폭력적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도시의 현재 속에서 그 깊은 상흔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상상치 못했던 놀라움이다. 도대체 이 도시의 풍경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 바르샤바 구시가지 광장.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 5층 짜리 부유한 상인들의 주택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울린다.
▲ 바르샤바 구시가지 광장.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 5층 짜리 부유한 상인들의 주택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울린다.

도시로서 바르샤바의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라쿠프를 도읍으로 삼아 피아스트 왕조를 열었던 시기에 이곳은 마조비아 공작이 영주로 일대를 다스리던 작은 도시였다. 오늘날의 왕궁구역과 구도심 광장, 성곽이 형성된 것도 그 기원을 살피면 14세기경까지 올라가게 된다. 물론 현재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고딕시대 지방도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바르샤바가 대도시의 품격을 갖춘 것은 당연히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16세기경의 일이다.

하지만 수도로서 바르샤바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선거왕제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반면 왕권은 약화되면서 주변 강대국들의 외침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략은 정치적 지배에 머물지 않고 잔인한 파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수세기에 걸쳐 파괴와 재건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17세기 이전 바르샤바의 모습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20세기 이후에 복원된 모습이다.

중세 성곽도시로서의 역사를 증언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바르샤바 옹성(barbican)이다. 중세시대라면 이곳이 도시로 들어서는 첫 관문, 즉 정문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근대의 도시계획은 구도심의 출입동선을 왕성광장에서 시작하게 함으로써 이 옹성이 마치 도시의 후면에 있는 후문처럼 오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도시적 장소로서 구도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곳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순서라 하겠다.

옹성을 지난 대로는 도심 중앙에 있는 광장으로 향한다. 바르샤바의 중심이자, 구도심의 중심인 시장광장(Rynek Starego Miasta)이 나타난다. 가로 90m, 세로 73m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광장이다. 시각적 초점이 될 만큼 크고 화려한 교회나 관청도 없다. 자칫 공허해 질수도 있는 거대하고 단순한 형상이지만 위압적이지도 단조롭지도 않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 5층 짜리 부유한 상인들의 주택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울린다. 화이부동(和以不同)이다. 층수, 창문 규모와 배치, 경사지붕 등은 동일한 형식을 지키면서 저마다 독특한 색상과 재료의 다채로움이 생동감을 만든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다.

시장과 더불어 백성들의 생활중심이었던 이곳은 13세기에 시작되지만 현재의 모습은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본래 광장의 중심에는 시청이 있어 길드와 상인 대표들이 회합을 갖거나 재판과 처형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역사처럼 갖은 수난 속에서 여러 차례 재건의 과정을 거치다가 2차 대전 중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독일군에게 저항한 바르샤바 봉기의 근거지였기에 집중포화를 받고 파멸지경에 이른 것이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처참하게 파괴된 광장과 주변건물들의 당시 모습이 사진 한 장에 담겨있다.

현재의 모습은 1950년대에 복구한 모습이다. 가로변에 걸려 있는 폐허화된 구도심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 이 광장이 최근에 복원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텅 비어 버린 이곳을 사람들의 활동이 채우고 있다. 광장은 역사적 경관 속에서 마당이 되고, 무대가 되어 새로운 부가가치로 부활했다. 사진을 보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 다시 살핀다. 비뚤어진 창호 하나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해 내려 했던 폴란드인의 정성과 의지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폴란드인들은 전후 복구에서 역사적 장소의 복원을 최우선으로 삼았음에 틀림이 없다. 성금과 원조로 모인 많은 돈을 복원사업에 투여했다. 그들은 재정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면서 경제적 효용성을 몰랐던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들은 과거의 건물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역사를 복원하려 했을 것이다. 장소와 건축은 공유된 기억과 인식을 위한 사회적 장치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해 50만 명이 넘는 관광객까지 덤으로 받았으니 일석수조(一石數鳥)의 효과가 아닌가. 해방된 지 팔십 년이 가까워도 경희궁하나 복원하지 못하는 우리와 다른 점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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