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남인의 고장’ 울산에서 노론 입지 넓히려 난곡서원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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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남인의 고장’ 울산에서 노론 입지 넓히려 난곡서원 세워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1.07.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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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서원 유생들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올린 품목.

울산 난곡서원은 1847년(헌종 13년) 울산 사림 고제응·서극진 등이 건립하고 이듬해(1848) 위패를 봉안하여 개원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주향하고 김창집·김제겸 부자를 배향했다. 우암은 조선 후기 서인 노론(老論)의 거두로서 정계와 학계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김창집은 우암의 제자이면서 정치적 후계자인 김수항의 아들이며, 김제남은 김창집의 아들이다.

이처럼 난곡서원은 남인의 고장 울산에서 새로이 등장한 노론이 입지를 넓히기 위해 집권 노론당의 인물을 모셔 호가호위(狐假虎威)한 서원이다. 이들을 신출노론(新出老論), 또는 신노(新老)라 한다. 이 서원의 설립과 훼철에 대해서는 필자가 간략히 서술한 바 있다.(송수환, 2016, 나의 울산사 편력) 이에 본고에서는 서원 건립과 폐원을 둘러싼 지역의 당쟁과 이에 연관된 화양서원의 역할 등 숨은 이야기를 살피기로 한다.
 

▲ 울산부사가 화양서원에 보낸 답통문.
▲ 울산부사가 화양서원에 보낸 답통문.

◇화양서원에서 모셔온 우암 영정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본관이 달성, 호는 임재(臨齋)이다. 노론 홍직필의 문인이어서 남인 지역 영남에서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일생을 관로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일관했다. 1845~1861년(헌종 11~철종 12) 16년 5개월간의 일기를 남겼으니 <임재일기>이다. 여기에 울산 난곡서원 설립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의 1848년(헌종 14) 3월 10일자 일기이다. “구암서원에 가니 고을의 노소 10여 명이 모여있었다. 조금 있으니 예방이 와서 말하기를, ‘우암 선생 영정(影幀)이 온다는 기별이 있다’ 했다. 달성(대구) 아래에서 영정을 맞이하여 향교에 모시고 가 배례한 후 출발했는데, 숙소는 하양이라 했다. 장차 울산 난곡원에서 봉향한다 했다.” 구암서원은 대구에 있는 달성 서씨 가문의 서원이다. 우암 선생은 송시열이고, 난곡원은 난곡서원이다. 우암의 영정을 멀리 화양서원(華陽書院)에서 모셔오는 장면이다.

화양서원이 어떤 곳인가? 1695년(숙종 21) 우암을 제향하기 위해 문인 권상하·정호 등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 세운 서원인데, 건립 이듬해(1696) 사액되었다. 여기에 서원을 세운 것은 우암이 병자호란 이후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했고, 암벽에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을 새겨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화양서원은 조선 후기 우암을 제향하는 44개소 서원의 중심이 되었다.

‘대명’은 명나라를 말하며,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이다. 우암은 의종의 친필 ‘非禮不動(비례불동)’을 암벽에 새기고 암서재라는 재실을 세워 제자를 길렀다. ‘화양’은 지명인데, 이곳은 본래 황양목(黃陽木, 회양목)이 많아 ‘황양’이었다. 이를 우암이 ‘중화(中華)의 정신을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화양’으로 바꾸었다 한다. 그는 이렇듯 철저한 친명사대주의자였다.

▲ 우암이 화양동 절벽에 새긴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 우암이 화양동 절벽에 새긴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화양서원의 위세

화양서원은 영조 때 노론의 일당 전제정치가 정착하고 또 우암이 문묘(文廟, 공자의 사당 대성전)에 배향되자, 위세는 날로 더해 민폐를 끼치는 온상이 되어갔다. 각 고을에 ‘서원에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언제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고지서를 발송했으니 이를 화양묵패(華陽墨牌)라 했다. 이를 받은 관·민은 전답을 팔아서라도 바쳐야만 했으니, 불응하면 수령은 체직하고 백성들은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 행패가 막심했다.

근자에 필자는 난곡서원과 화양서원에 관련된 고문서 한 장을 찾았다. 1848년 3월 화양서원 재임(齋任) 2명 및 유생 49명이 연명으로 경상도관찰사 김공현에게 올린 품목(稟目)이다. 품목은 서원·향교에서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대개 그들 서원과 향교의 권리와 특전을 요구하는 진정서이다. 이 품목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암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마다 영령을 모신 곳이 있습니다. 귀도(貴道, 경상도)의 울산도 선생께서 자취를 남기신 곳이라 여러 유생이 영당(影堂)을 설립했습니다. 지난 해 봄 성균관의 통문과 울산향교의 문자가 화양서원에 왔기에 선생 주손(胄孫)이 길일을 택해 영정을 옮겼습니다. 본손과 유생들이 영정을 모셔가는데, 영남의 중간에서 행로를 가로막는 변이 일어났으니, 상주 유생 이용구와 성백원의 짓이었습니다. 이런 패망한 무리의 죄는 사림의 법도에 관련되기에 감영에 관문을 보내니 합하께서는 법에 따라 논해주십시오.”

화양서원에 통문을 보낸 성균관과 울산향교 유생들은 노론임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우암의 영정을 난곡서원에 모셔가는데 상주 유생 2명이 길을 막았고, 화양서원 유생들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올렸던 것이다. 이를 접한 경상도관찰사의 제음(題音, 처결문)은 다음과 같다. “상주 고을 두 유생의 패악한 거조는 심히 놀랍고 해괴하다. 해당 고을에 관문을 보내 무겁게 처벌할 것이니 이로써 양해함이 어떠한가?” 화양서원은 이처럼 경상도관찰사에게 작폐한 유생 처벌을 요구할 만큼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난곡서원의 호가호위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다음은 2017년 울산박물관에 기증된 난곡서원 관련 고문서이다. 1851년(철종 2) 5월 울산부사 조철림이 작성한, 화양서원에서 울산부에 보내온 통문(通文)에 대한 답신이다. 난곡서원 설립 3년 후의 일이다. “첫째, 난곡서원 영정은 이미 돌려받아 봉안했기에 유림에는 다행입니다. 둘째, 제수(祭需)는 본관(울산부)에서 준비하여 지난 봄 제향 때부터 봉납하고 있습니다. 셋째, 서원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는 본관 소관이 아니어서 감영에 보고했으니 그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언젠가 난곡서원에 봉안한 우암의 영정을 도난당했는데, 이를 돌려받았다 했다. 영정 절도는 울산의 남인 유생들 소행이었을 것이다. 또한 울산부는 난곡서원의 제수를 지난 해부터 봉납하고 있었다. 화양서원이 묵패를 발급하여 제수전을 횡렴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다시 난곡서원에서 서원을 수호하는 민호 분정(分定)을 요구했는데, 이는 울산부사가 아닌 경상도관찰사 소관이었다. 전후 맥락을 보면 화양서원이 난곡서원의 울산부사에 대한 청탁을 대신했고, 울산부사가 수용 여부를 화양서원에 답한 것이다.

이처럼 난곡서원은 울산의 일부 신노들이 화양서원의 우암 영정을 모셔와 명분을 확보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영정의 행차를 가로막거나 훔쳐내는 등 영남과 울산 남인의 거센 저항과 반목이 계속되는 한 존립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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