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시험 기간이면 공부하기를 강요하는 어머니를 피해 화장실에 숨어들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책을 읽어댔고, 방학이면 도서관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집어삼킬 듯이 밤낮으로 읽어댔다. 그렇게 홀린 듯이 사춘기 시절 몇 년을 지내다 보니, 활자중독증에 걸려 반 년 가까이 고생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때 만큼은 아니지만 당장 눈앞에 읽을 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고, 마음 맞는 책 한 권을 만나면 설레 잠을 설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모든 상황을 녹여놓은 재치 있는 표현에 깔깔깔 웃고, 소설 속 주인공에 빙의되어 가상의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증오하기도 하고, 작가가 내 지인인 것처럼 느껴 함께 좌절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내가 책 속에서 느끼는 이런 희로애락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다. 교사가 되면서 내가 맡은 학생들이 내가 느낀 것 만큼은 아니라도 이런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때로는 학부모들께서 담임인 나에게 책 읽는 활동들을 학생들과 함께하기를 정중하게 부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책 읽기의 자발성에 대해 떠올리며 내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하곤 했다.
지난주에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돌아와 교내 메신저를 켰는데, 학교 사서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교내 독서 행사로 ‘인생 책을 추천합니다’라는 이벤트를 하는데, 사춘기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문학작품이나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의 소개글을 적으면, 도서실에 소개글과 책을 함께 전시하고, 여름방학 도서 추천 목록에 넣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즐거움만을 위해 이기적인 독서를 해왔는데, 차라리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선생님에게 책을 추천하라면 하겠는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책을 추천하라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편독이 매우 심해, 균형 있는 책 읽기를 추천할 수 없어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넘어가려는데, 며칠 후에 다시 메시지가 왔다. 거절하기가 힘들어, 근처 자리에 계신 국어선생님과 그 독서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사춘기 시절 독서를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뒤 ‘앵무새 죽이기’ ‘프랑스적인 삶’ ‘그리운 메이아줌마’ 등을 추천하는 글을 간단하게 적었다.
가벼운 느낌의 짧은 글이었지만, 아이들이 읽을 글이라 단어 하나하나 신중히 고르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글을 적으면서 참 많은 감회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 학교 도서관엔 아이들이 읽을만한 양서들이 빼곡하고, 전문 사서 선생님께서 매달 즐거운 독서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이렇게 열심히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유인하는데, 나는 그저 조금 도와드리면 되는데, 왜 이걸 거절했을까. 또 한편으로는 매우 기쁜 마음이 들었다. 단 한 명이라도, 나의 추천글을 보고, 제목도 알지 못했을 그 책을 만나게 된다면, 그 책이 그 아이에게 작은 위로 혹은 즐거움이 된다면, 그리고 그 한 명이 내가 학교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아이라면, 이 또한 책 읽기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요즘 아이들은 영상세대야’라고 단정지으며 책과 가깝게 해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나였다. 그러나 둘러보면 교실에서 시간을 주면 책을 꺼내 읽는 아이들이 제법 많다. 공부에 관심도 없고 말썽꾸러기라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꽤 두꺼운 철학 서적을 꺼내 읽는 걸 보고 놀란 적도 있고, 부모를 따라 해외주재원으로 떠나는 아이가 가지고 갈 물건 1순위로 어느 작가의 참여 문학 시리즈를 꼽는 걸 보고 신기해한 적도 있고, 도서관에서 독서이벤트를 하면 종 치기 전부터 자세를 잡고 도서관으로 달려가려는 아이를 보며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어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책 읽기의 즐거움을 조금씩 넓혀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실에서도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자주 보여주고, ‘너도 한번 읽어봐’라며 가볍게 추천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누군가 나처럼, 단 한 명이라도, 책 읽기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또한 교사가 누릴 수 있는 아주 큰 기쁨이 아닐까.
윤미나 남외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