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숙의 한국100탑(47)]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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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숙의 한국100탑(47)]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 경상일보
  • 승인 2021.07.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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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혜숙 수필가

주지스님은 계속 차를 따르셨다. 그리고 마당에 핀 도라지꽃보다 너희가 더 아름답다고 했다. 처음 먹어 보는 차는 떫었다. 나는 도라지꽃과 삐죽이 높이 솟은 탑만 무연히 바라보았다. 그 ‘아름답다’는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미인인 옆의 친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름 오후의 뙤약볕을 받으며 서 있는 묘하게 붉은 탑은 나처럼 외로워 보였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 기둥대신 조각된 인물상은 무거운 탑을 받치고 있느라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목표 없는 진로에 대한 내 고민과 방황도 대신 짊어지고 있는 듯 안쓰러웠다.

고3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하기 전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친구랑 둘이 지리산 대원사로 갔다. 며칠 비가 내려 거세게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와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외에 절집은 적요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이라 스님들도 스쳐 지나고 공양주 보살도 누룽지만 슬쩍 건네주고 말을 붙이지 않았다. 주지스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조촐한 차 자리를 만들었고 열아홉 살, 그녀의 눈부심에 마음을 빼앗겨 긴 시간동안 차를 우려야 했다.

▲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그 후, 여러 번 대원사를 찾았지만 석탑과의 재회는 어려웠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담장 밖에서 쭉 뻗은 찰주와 상륜부만 보고 돌아서야했다. 가끔 행운이라는 것이 찾아온다. 드디어 스님의 허락을 받고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인 대원사 다층석탑을 보게 되었다. 2층의 기단위에 8층의 탑신을 올렸다. 높이 5.5m로 보물 제1112호다. 높다란 배례석도 그대로고 위층 기단 모서리에 서 있는 인물 입상도 눈 시린 그날 오후처럼 탑을 받들고 있다. 그런데 석인상의 표정이 예전과 다르다. 무거운 돌덩이가 아니라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듯 환한 모습이다. 마음에 따라 대상이 모두 다르게 보인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군더더기 없는 늘씬한 탑이 도라지꽃처럼 어여쁜 열아홉 소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햇볕 쨍쨍한데 매미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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