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왕실 진상 위해 알몸으로 잠수…울산 어부들 목숨 건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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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왕실 진상 위해 알몸으로 잠수…울산 어부들 목숨 건 노동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1.08.2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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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달수의 <남유일기> 중 어부의 채복 장면.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울산군, 토공(土貢)·토산(土産)·토산공물(土産貢物)조에는 전복(全鮑(전포), 鰒(복))이 실려있다. 울산군에서 전복을 채취해서 진상한다는 뜻이다. 진상이란 국왕과 왕실에 식용품을 바치는 일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것이 세분되어 생복·숙복·건복이 있는가 하면 인복도 있었다. 생복은 살아있는 전복, 숙복은 익힌 전복, 건복은 말린 전복, 인복은 얇고 길게 말린 전복이다.

1665년(현종 6) 경상도 감사의 보고에 “국왕 생일에 진상한 전복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만큼 부패했으니 울산부사 정승명을 파출해야 합니다.” 했다. 전복을 진상하는데, 품질이 나쁘면 부사를 파직할 정도로 엄격하게 수취했음을 알 수 있다. 전복을 진상할 때는 서울까지의 장거리 이동이 불가피한데, 이 과정에서 부패하기도 했던 것이다.
 

▲ 심원열의 ‘채복설’ 중 이교가 침수군에게 한겨울 채복을 강요하는 장면.
▲ 심원열의 ‘채복설’ 중 이교가 침수군에게 한겨울 채복을 강요하는 장면.

◇물선군과 침수군이 진상 담당

<여지도서>에 실린 경상좌병영지 진공(進貢)조에는 “한 달을 걸러 생복 150개, 숙복 150개를 봉진한다. 반건전복(半乾全鰒, 반쯤 말린 전복)은 내의원의 관문(關文)에 따라 채취하는대로 날마다 봉진하는데, 관문이 없으면 정지한다.” 했다. 봉진은 진상품을 바친다는 뜻이다. 이로써 병영에서도 전복을 진상했음을 알 수 있다. 내의원은 왕실 의료를 담당하는 관부인데, 여기서 반건전복을 수취한 것은 약재로 쓰려는 것이다. 이를 매일 봉진하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을 것이다.

병영은 진상할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을 수취하기 위해 해안에 거주하는 어부들에게 채취 임무를 맡겼다. <울산부호적대장>에 자주 나타나는 ‘병영 물선군(物膳軍)’ ‘병영 침수군(沈水軍)’이 이들이다. 물선군·침수군은 울산 밖에 있는 감영·수영·통영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울산부에서도 따로 전복을 진상했지만 병영처럼 구체적인 품목과 숫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역시 울산부에 속한 물선군과 침수군이 이를 담당했다.

물선군·침수군은 소속 관부에 전복을 납부했는데, 관부는 이로써 진상에 충당하고 일부는 자체 소비했다. 관부가 아닌 향청(鄕廳)과 향교에도 물선군이 소속되어 있었으니, 토착 양반층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울산의 어부들은 물선군과 침선군으로서 4영(營)과 울산부, 그리고 향청과 향교 등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전복을 채취하여 납부했다. 이 전복채취 노동을 채복(採鰒)이라 한다.

채복은 처음에는 연해의 얕은 바다에서 시작했지만, 채취가 계속됨에 따라 전복 개체가 줄어들고, 이로 인해 어민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먼 바다로 나가서 조업하게 되었다. 1693년(숙종 19) 기록에 “연해 수령들의 말을 들어보면, 경상도 어민들이 울릉도와 다른 섬에 왕래하면서 전복을 따고 있지만, 백성들이 생업으로 삼으므로 금할 수 없습니다.” 했다. 울릉도까지 가서 전복을 따는 ‘경상도 어민’에는 필시 울산 어민도 있었을 것이다. 울산에서 잘 알려진 염간 박어둔이 울릉도까지 간 것은 전복을 채취하려는 것이었다.

1787년(정조 11) 울산에 사는 어부 추잇돌, 최잠돌 등이 사공 14명을 데리고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60일 가까이 머물면서 전복을 채취하다가 삼척영장과 삼척부사에게 잡혔다. 당시 정부는 울릉도 거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키기 위해 출입을 금하는 수토(搜土)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산 어부들은 병영이 발급한 채복완문(採鰒完文)을 가지고 해마다 울릉도에 와서 전복을 채취하고 있었다. 채복완문이란 채복을 허가하는 공문인데, 경상좌병사가 사사로이 발급한 것이었다. 이는 수토정책에 반하는 불법이었으니, 이로써 완문을 발급한 경상좌병사 강오성과 어부를 단속하지 못한 울산부사 심공예가 파직되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채복 노동

이렇게 울릉도까지 가서 채복하는 것은 진상품은 크기와 맛이 특별히 좋아야 하는데, 가까운 바다에서는 이를 채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라도 해안 고을에서는 외딴 섬에서 전복을 채취하는 일을 일일이 금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각 포(浦)의 만호가 어부들을 수호하고, 이들의 사사로운 채취를 금하게 한 일도 있었다. 외딴 섬 채복을 허용한 것은 근해에서는 품질 좋은 전복을 채취할 수 없었고, 사사로운 채복을 금한 것은 어부들이 몰래 판매해서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었다.

바다에서의 어류 포획은 모두가 고된 일이지만, 채복은 알몸으로 바닷물 깊숙이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에 특히 힘든 노동이었다. 당시의 채복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 하나를 보자. 송달수(1808~1858)는 경주와 인근 여러 곳을 유람하고 그 여정을 <남유일기(南遊日記)>에 남겼다. 여기에 동해에서 채복하는 장면이 실려 있으니 다음과 같다.

“어부가 긴 새끼줄 끝에 물에 뜨는 가벼운 나무껍질(木皮, 목피) 여럿을 하나로 묶어 띄운다. 다른 한쪽 끝을 허리에 묶고는 작은 칼을 가지고 바닷물에 들어가 전복을 캔다. 숨이 차면 물 위로 솟아올라 나무껍질에 가슴을 대고 쉬었다가 다시 들어가니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무껍질 묶음의 부력(浮力)을 이용해 호흡하고 휴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삶을 도모하는 방법이 많지만, 이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니 어찌 누가 요구해서 하는 것이겠는가. 오직 생계를 위한 것이다.”

한겨울의 채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역이었다. 다음은 1855~1856년 울산부사를 지냈다가 1858년 옛 임지 울산부에 유배된 심원열의 ‘채복설(採鰒說)’을 축약한 것이다.

“손님들과 함께 어풍대에 갔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흉용하였다. 이교(吏校, 향리와 장교)가 ‘오늘은 바람이 심해 채복은 어렵습니다.’ 했다.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왔으니 바람이 불더라도 채복을 보려한다.’ 했다.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교가 침수군 둘을 데려와 채복을 명하니 날이 춥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이교가 꾸짖기를, ‘사또께서 추운 날씨에 불구하고 나오셨는데 너희들이 불응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재촉했다. 침수군이 발가벗고 작은 광주리를 차고는 바다에 들어갔다. 한참 후 파도 위로 솟아올랐는데, 몸은 얼어 푸르딩딩하고 입이 굳어 말을 하지 못했다. 광주리에는 전복 십여 개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술 한 사발을 마시고 피워둔 불을 쪼이니 시체 같던 몸이 홀연히 되살아났다.”



◇갑오개혁으로 진상 폐지

1894년 <영남좌병영지>에 따르면, 울산 병영의 전복 진상은 1801년(순조 1)에 폐지했다가, 1819년(동 19)에 복립하고, 1822년(동 22)에 수를 늘렸다가, 1861년(철종 11)에 폐지하고, 1879년(고종 16)에 다시 복립하는 등 치폐를 거듭했다. 마침내 갑오개혁으로 진상은 모두 폐지되어 울산 어민은 수백 년 간의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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