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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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낭만에 대하여
  • 경상일보
  • 승인 2021.09.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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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엽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이렇게 시작한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 노래 속의 화자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살아가는 한 중년 남성으로 비 내리는 어느 날 오랜 추억을 간직한 ‘옛날식’ 다방에 앉아 1950~60년대를 대표하던 도라지 위스키(사실상 위스키 맛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색소폰 소리와 함께 추억에 젖어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이 남성은 늦은 밤 항구에서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먼 옛날 헤어진 ‘첫사랑 그 소녀’를 기억해낸다. 그는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 속에 인생의 무상함에 서글퍼하면서 결코 젊음의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체념 속에서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동경한다. 이 노래는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생존과 부의 축적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 성공과 성취감의 그 이면에 깊은 허전함과 아픈 상실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낭만에 대하여’가 자아내는 이러한 우울(melancholy)과 동경의 분위기는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은은하게 적시며 어떤 위안을 주고 있다.

우리는 ‘낭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낭만은 프랑스어 ‘roman(로망)’의 일본어 음역인 낭만(浪漫)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말로서 20세기 초 일본에 의해 소개돼 1910~20년대 우리 문단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았던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우리는 낭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사전을 찾아보면,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로 정의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낭만의 다양한 측면과 깊은 의미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의 본래 정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낭만주의는 어떤 이유에서 탄생한 것일까? 낭만주의는 17세기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의한 세속화, 산업혁명과 과학주의가 가속화시킨 산업화와 도시화, 자본주의의 심층에 존재하는 이윤 추구에 대한 강박적 몰두 경향에 대항하여 18세기 말부터 ‘새로운 것’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미학적·예술적 정신 운동으로 생겨났다. 특히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과 미학에 예술적 상상력의 자양분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는 정치적·역사적 관점에서 복고적이고 민족주의적 보수성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초기 낭만주의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태로서 정신사적 혁명성을 보여주었고, 현재에도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세속화’ 경향에 맞서고 ‘속물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어떤 ‘초월성’을 추구하는 자들로서 존재해왔다. 또한 이들은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 보다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 어떤 규정될 수 없는 것, 어떤 미지의 것을 동경했던 것이다.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 노발리스(Novalis)의 ‘푸른 꽃(die blaue Blume)’은 이러한 동경과 사랑, 그리고 초월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노력을 상징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방황은 ‘푸른 꽃’을 찾기 위한 필연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낭만의 정신은 ‘낭만에 대하여’에서처럼 상실과 우울의 분위기나 몽상적이고 회고적인 분위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낭만의 정신은 ‘신이 떠나버린 시대’ ‘선험적 고향상실의 시대’(게오르크 루카치)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힘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어떤 초월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인 것이다. 우리에겐 여전히 이러한 낭만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낭만의 정신 속에서 그저 ‘잃어버린 것’과 ‘다시 못 올 것’에 대한 동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물적이고 탐욕적이고 비정한 현대 사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상 사회’를 꿈꾸고 또 제시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이상엽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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