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61)]이스탄불 만들기, 술레이마니에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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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61)]이스탄불 만들기, 술레이마니에 모스크
  • 정명숙 기자
  • 승인 2021.09.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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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1453년은 터키의 문명과 역사가 바뀌는 획기적 전환점이다. 이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동시에 종교적, 문명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동로마제국에서 오스만제국으로 전환되었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문명에서 이슬람문명으로, 지리적으로는 유럽권에서 아시아권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도시 이름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게 된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은 술레이마니에 대제(재위 1520~1566)다. 서구사회에서 조차 ‘위대한 군주(Sulyemanye magnificient)’로 알려질 만큼 위대한 정복자이며, 오스만 제국의 관료조직과 입법체제를 수립한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발칸반도를 넘어 헝가리를 점령하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대, 중동 및 아라비아 반도 일대를 편입하여, 지중해와 중동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자신을 ‘황제 중의 황제’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고, 사후에 천국으로 인도할 위대한 기념물을 세우라 명했다.

▲ 술레이마니에 사원은 밝은 대리석의 경쾌함과 세장한 기둥, 밝고 섬세한 창호로서 이슬람 건축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
▲ 술레이마니에 사원은 밝은 대리석의 경쾌함과 세장한 기둥, 밝고 섬세한 창호로서 이슬람 건축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소피아사원를 건설하면서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임을 천명했었다. 술레이마니에 대제는 이를 대체하는 모스크를 건설하여 이 도시가 오스만 이슬람 제국의 수도임을 선포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도시의 지형적 스카이라인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세 번째 봉우리에 터를 잡았다. 그곳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둔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또한 도시경관을 주도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 봉우리를 타고 앉은 거대한 모스크의 실루엣은 오늘날 이스탄불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경관이며 랜드마크가 되었다.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기까지 사원의 위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거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서야 이곳이 목적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구에서도 사원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성처럼 담장을 두르고 2층짜리 아치문을 통과해야 사원과 만날 수 있다. 대문에서 보이는 사원의 모습은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석조건축물의 옆모습이다. 협착한 대지 탓에 정면(파사드)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이 건물은 골든혼해협을 건너 신시가지에 가서야 전모를 바라 볼 수 있다. 건축가는 분명 그렇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이 건물을 설계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원경을 위한 건축임에 분명하다.

사원 앞에는 작고 아름다운 팔각형 건물이 먼저 나타난다. 이 사원의 건설을 명했던 술레이마니에 대제와 그 아내의 영묘다. 영웅적인 대제의 위상에 비하면 황릉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소한 편이다. 거창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팔각형의 본채는 2층으로 구성되는데, 1층에는 세장한 기둥과 아치로 주랑을 덧붙여 2층과 구분하면서 안정감을 취했다. 전체적인 균형감, 정숙함과 격조, 경쾌하고 섬세한 이슬람 건축의 미학이 듬뿍 담긴 보석상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묘 옆으로 난 작은 길은 다시 담장과 작은 아치문으로 감추어 호기심을 고조시킨다. 그 작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열리는 광대한 파노라마, 해협을 사이로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이스탄불의 전경에 솜털이 솟는다. 흑해와 마르마라해까지 연결되는 광활한 시계. 호수 같이 잔잔한 바다와 나지막한 언덕 위에 꽃송이처럼 피어오르는 돔 지붕의 모스크들이 그려내는 도시의 실루엣. 이보다 더 이스탄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탄성이 저절로 토해진다. 시각의 범주만큼 분명한 영역적 경계는 없다. 대제는 이곳에서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와 자신을 인도해준 알라와 내세를 향한 안식을 생각했을 것이다.

사원건축은 성소피아사원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 그들에게 성소피아는 기독교 교회이기에 앞서 위대한 건축적 걸작이었다. 비잔틴 양식의 차용은 로마제국을 계승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중앙 돔을 중심으로 크기가 다른 작은 돔들이 에워싸는 형식은 비잔틴 건축의 계승이다. 자신들도 성 소피아 사원과 같은 걸작을 지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하지만 소피아처럼 지나치게 어둡거나 무겁지 않고, 블루모스크처럼 지나치게 가볍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아 소피아가 붉은 벽돌의 엄숙함, 중량감 있는 버트레스와 기둥, 무거운 침묵과 강렬한 빛을 주제로 삼았다면, 술레이마니에는 밝은 대리석의 경쾌함과 세장한 기둥, 밝고 섬세한 창호로서 이슬람 사원의 성격을 표현했다. 거대한 대리석 매스를 이토록 경쾌하고 아기자기에게 구성한 것은 너무도 경이로운 일이다.

벽면은 작은 주랑들과 아치 창을 이용해 다채롭게 분절시키고, 지붕은 다양한 크기의 돔들로 오밀조밀한 구성미를 연출했다. 크면서도 육중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다. 기품이 있으나 단조롭지 않고, 변화무쌍하나 번잡하지 않다. 가히 중용의 균형감이라 할 것이다. 연한 갈색 혹은 연한 회색 무늬의 대리석을 절묘하게 구성한 탓일까. 마치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처럼 깨끗하고 기품이 있다. 하지아 소피아의 거대함에 아라베스크의 섬세함이 가미되었다고 할까. 술레이마니에 사원은 이후 오스만 모스크 형식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을 보지 않고는 투르크인들의 이스탄불과 이슬람 건축의 위대함을 논할 수 없으리.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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