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유배생활 중 언양의 아름다운 풍광 詩로 남긴 조선후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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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유배생활 중 언양의 아름다운 풍광 詩로 남긴 조선후기 문신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1.09.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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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울산 울주군 화장산 전경.
▲ 오늘날 울산 울주군 화장산 전경.

언양에 유배왔던 유명 인물로는 고려말 우왕 때의 정몽주와 조선후기 숙종 때의 권해(權瑎)가 있다. 정몽주의 언양 유배는 잘 알려져 있고, 반구서원은 정몽주·이언적·정구 세 분을 봉안했지만, 실제로는 정몽주를 봉향하기 위해 지었음은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권해의 언양 유배와 그가 유배지에 남긴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그가 조선후기 언양에 남긴 큰 족적을 접하게 된다. 그의 본관은 안동,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이다. 언양에서는 호가 남강(南岡)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 찬술한 그의 묘갈명에 “남곡집 10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했으니 성호를 따라 남곡으로 표기함이 옳겠다.

▲ 권해의 화장산 사랑을 전하는 의 기록
▲ 권해의 화장산 사랑을 전하는 의 기록

◇청남과 탁남 당쟁의 희생

권해의 아버지는 호조판서 권대재이고, 어머니는 신평이씨이다. 1639년(인조 17) 양성(陽城, 오늘의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에서 태어났다. 1655년(현종 6)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부정자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예조·병조좌랑, 이조정랑, 사간원정언·대사간, 사헌부지평·대사헌, 홍문관응교, 승정원승지, 성균관대사성, 경상도암행어사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숙종 초기에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679년(숙종 5) 판중추부사 허목이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의 불법행위를 공격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남인은 허목의 청남과 허적의 탁남으로 분열했다. 당시 남곡 부자는 청남으로 몰려 아버지는 전라도 광주로, 자신은 경상도 청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4개월 만에 방면되었다가 1680년(동 6)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사건이 일어나 다시 평안도 창성으로 유배되었고, 6년이 지난 1686년(동 12)에 언양으로 이배되어 약 3년간 적거했다.

1689년(동 15) 장희빈 소생 왕자(후의 경종) 탄생 1주년을 맞이하여 세자책봉을 논의할 때 서인 세력이 반대하자 숙종이 기사환국을 일으켜 남인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남곡은 사간원대사간으로 복귀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 강화유수, 사헌부대사간, 예조·병조·예조참판, 홍문관제학·부제학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94년(동 20) 숙종이 서인을 앞세워 장희빈과 남인을 축출하는 갑술옥사를 일으켰을 때 다시 영해로 유배되었다. 1696년(동 22) 진보로 이배되었고, 이듬해(1697) 석방되어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안동 예안에 거주하다 사망했다.
 

▲ 권해의 7언율시 ‘석남사’.
▲ 권해의 7언율시 ‘석남사’.

◇화장산 복숭아꽃의 재발견

남곡이 종신한 예안은 선대의 세거지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양성이지만, <사마방목>에 따르면 부 권대제, 조부 권위중은 거주지가 한성이고, 증조부 권협은 미상, 고조부 권상과 5대조 권심협은 안동으로 되어있다. 이로 보아 남곡 가문은 예안이 본향인데 증조부 권협이 1577년(선조 10) 알성시에 합격하면서 서울로 이주했고, 이후 대대로 서울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태어난 양성은 모 신평이씨 가문의 세거지였을 것이다.

그의 언양 유배생활은 저술과 시작(詩作), 제자 양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유배생활을 보자. 필자 미상의 <헌양잡기>(1915) 천적(遷謫)조에 이렇게 기술했다. 천적은 유배와 같은 말이다. “권해는 본관이 안동이고 호는 남강이다. 숙종조 갑술년(1694)에 시랑으로서 폄류되었다.” 그의 호가 남곡임은 앞에서 보았지만, 갑술년에 언양에 유배왔다는 기술은 사실과 다르다. 갑술년은 갑술옥사(1694)를 말하는데, 이 때 유배된 곳은 영해이다. 그가 언양에 유배된 해는 1686년이다. 또 당시 관직이 시랑이라 했는데, 조선시대에 시랑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유배 당시 호조참의였는데, 이를 시랑이라 칭한 듯하다.

그는 언양 적거시에 유달리 화장산을 사랑했다. 적소(謫所)가 화장산 아래 송대리였음을 알 수 있다. <헌양잡기> ‘화장암 고지(故址)’ 항에 이렇게 기술했다. “권해가 유배생활 하면서 근심을 풀 때는 언제나 유종원(柳宗元)이 고무담을 찾듯 화장암을 찾았다. 마침내 시노(詩奴) 진묵에게 명해서 재물을 모아 도화(桃花) 옛자리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 했다.

이어 “1695년(숙종 21) 암자가 불타버리니 1748년(영조 24년) 언양 사람들이 집을 지어 유생들이 글짓는 장소로 삼았다. 여기에 ‘화장암’ 옛 편액을 걸고, 서쪽 마루에는 ‘청심루’ 편액을 걸었으니, 이 때부터 중들이 모여들고 사방에서 선비들이 찾아왔다. 1755년(영조 31) 큰 흉년이 들어 중들이 흩어지니 암자가 피폐해져 무너지고 말았다” 했다.

고무담은 중국 호남성에 있는 명승지이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이 ‘고무담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에 대한 글(鈷鉧潭西小丘記)’에, “고무담 서쪽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어 경치가 매우 뛰어나다. 이곳을 사들여 친구들과 노닐며, 잡초와 거친 나무를 베어버리고 나무와 바위와 대나무를 구경하며 즐겼다” 했다. 시노는 시에 탐닉하는 사람을 뜻하고, 진묵은 승려의 이름이다.



◇새로 찾은 언양경승 한시 7편

도화 옛자리는 화장산 설화에 나오는 비구니 도화를 따 이름지은 암자 터였던 듯하다. 그는 여기에 암자를 지어 ‘화장암’이라 이름했다. 훗날 이곳이 불탄 자리에 유생들이 다시 암자를 짓고 ‘화장암’ 옛 편액을 걸었다 한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아마도 불상을 모신 작은 암자였을 것이다. 1757~1765년에 편찬한 <여지도서> 경주진관언양현 ‘고적’ 조에 “화장산 정상에 암굴이 있고, 암굴 앞에는 대(臺)가 있는데, 화장암 옛 터이다.” 했다. 오늘날은 이 암굴에 불상을 모시고 굴암사라 이름하고 있다.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남곡은 언양 적거시에 <춘추인씨지(春秋人氏志)>를 저술했다 하나 전해오지 않는다. 그는 언양의 경승지를 유람하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교남지>(1940) ‘언양군’ 조에 반구대와 작괘천을 읊은 시 한 편씩이 소개되어 있지만,(송수환, 2012, 태화강에 배 띄우고) <헌양잡기>에는 반구대 2, 작괘천 1, 석남사 3, 언양객관 1편 등 7편이 더 실려있다. 그의 <남곡집>은 전해오지 않는데, 여기에는 언양 일대의 경승시가 더 많이 실렸을 것이다. 여기에 석남사를 소재로 한 7언율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절간 방문이 어찌 이리 늦었는가/좋은 경치 만나서 시 읊느라 그랬지./창칼 같은 가지산은 하늘을 찌르고/낡은 벽 단청에 불상도 기이하다./나그네 회포에 밝은 달빛 비쳐오니/고승 발자취는 흰 구름이 알리라./솔바람 냇물소리 모두가 시원하니/곁방에 누운 이 나그네 좋은 꿈 꾸겠네.(訪寺何嫌到寺遲, 行逢佳處輒吟詩. 中天劍戟山形壯, 古壁丹靑佛像奇. 遠客襟懷明月照, 高僧?跡白雲知. 松聲泉響俱蕭爽, 一枕西廂客夢宜)”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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