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권순일 전 대법관의 재판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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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권순일 전 대법관의 재판거래
  • 경상일보
  • 승인 2021.10.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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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규 변호사

재판거래라는 죄명은 없다. 판사가 재판과 관련해 뇌물을 받으면 뇌물죄로 처벌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재판거래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정치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과중한 업무부담을 해소하려면 상고법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정치권에서 이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치사라도 하여 마음을 움직여 볼 요량으로 이미 결론이 난 판결 중에서 전 정권의 정책 기조와 일치하는 판결을 추려 대통령에게 한마디 하려 했다. 그렇게 한마디 하려고 준비한 메모지가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실제 양 전 대법원장이 그러한 말을 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로 부적절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그래서 뇌물죄는 불가능한 이 행위에 재판거래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더하여 정치적 의미가 덧칠해지면서 결국에는 뇌물죄보다 더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였다.

이런 재판거래라는 표현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계기가 대장동 게이트다. 이재명 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재판에 관여했던 권순일 전 대법관의 수상한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권 전 대법관은 이 지사가 무죄를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그가 화천대유의 고문이 되었다. 화천대유를 매개로 이 지사와 권 전 대법관이 연결되는 모양새다. 권 전 대법관은 이 사건에 관한 요약보고서만 보았기 때문에 화천대유를 몰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제2심판결문에는 화천대유가 3회나 언급된다. 또한 권 전 대법관이 퇴임 후에 펴낸 <공화국과 법치주의>라는 책에서 이 사건은 중요 판례로 소개되고 있다.

요약보고서라는 표현 자체도 굉장히 기만적이다. 법원 업무를 모르는 일반 국민은 “아, 대법원에서 주심 대법관이 아니면 대충 요약보고서만 보고 재판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애초 실무에는 요약보고서라는 표현이 없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의 연구보고서를 애써 그렇게 낮춰 표현한 것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은 대개 법관 경력 15년 이상의 현직 법관들이고, 법관 중에서도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매 사건에 심도 있는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는데, 그 내용이 중요 사건의 경우에는 학술논문의 분량을 넘어선다. 특히 이 사건과 같이 세간의 주목이 집중되는 사건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연구보고서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장동이나 화천대유에 관하여 몰랐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일에 게을리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애초 연구보고서에는 이 지사에 대해 유죄 취지의 연구보고서만 올라왔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종전의 대법원 판례를 따라가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맞다. 권 전 대법관 자신도 그 이전에 동종 판결에 대해 유죄의 취지로 판단했다. 그런데 이것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권 전 대법관의 주장으로 균열이 생긴 것이다. 결국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지면서 거의 숨통이 끊어졌던 이 지사의 정치생명이 부활한다.

여기에 이상한 정황이 더해진다. 화천대유 최대 주주인 김만배는 이 사건 판결 전후로 권 전 대법관을 여러 차례 방문한다. 대법원에 이발하러 갔다는 변명을 하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심지어 권 전 대법관이 ‘50억 약속 클럽’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설정보지까지 떠돈다.

물론 형사처벌이 필요할 정도의 위법이 있는지는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앞서 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거래 선례에 비춰 보면 권 전 대법관이야말로 진정한 재판거래의 당사자라고 보아야 한다.

전직 대법관이라면 화천대유라는 이름 없는 회사가 월 1500만 원이나 되는 고문료를 제안하면 당연히 의심해야 한다. 따져보지도 않고 덜컥 그런 거금을 받기로 약속했다면 그 자체로 재판거래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다고 봐야 한다. 내 재판으로 덕을 본 사람이 주는 돈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정이 이 정도에 이르면 권 전 대법관은 수사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필요하다면 대장동에 관한 특검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제대로 살펴야 한다. 사법부의 흔들린 신뢰를 찾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하다.

김태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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