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관료 탄 가마 메고 고통스런 산행, 억불정책 조선시대 승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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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환의 이어쓰는 울산史에세이]관료 탄 가마 메고 고통스런 산행, 억불정책 조선시대 승려의 삶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1.10.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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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인 남여(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금강산 중’이라는 말이 있었다. 서울의 높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가마를 메는 승려인데, 아무렇게나 부려먹을 수 있는 천한 중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억불시대 조선왕조에서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중앙 귀족들이 많았다. 이들은 오늘의 산행처럼 장비를 갖추고 직접 산을 오르지 않았다. 대부분 말이나 가마를 타고 유람했는데, 이 때 말을 몰거나 가마를 메는 자들은 대부분이 승려였다.



◇금강산 유람과 가마꾼 중

다음은 조선중기 선조~인조조에 사헌부대사헌·사간원대사간·성균관대사성 등 청요직을 지낸 문신 정엽(鄭曄, 1563~1625)의 금강산 유람기 <금강록(金剛錄)>의 한 장면이다.

“중 수십 명이 나와 맞이했는데, 모두 푸른 눈에 야윈 얼굴로 속세 사람과 모습이 달랐다.… 이제부터는 말이 갈 수 없으므로 옷과 양식을 나누어 아랫사람들에게 지고 가게 했다. 나서방과 이서방 그리고 원이와 함께 각자 남여(藍輿)를 타고 갔다.… 가마를 멘 중이 비오듯 땀을 흘리니 필경 내가 비대해서 고생하는 모양이다. 내가 편하려고 남을 힘들게 하니 실로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서방과 이서방은 정엽의 사위이며, 원이는 손자이다. 말을 타고갈 수 없는 좁은 길에서 일행 네 명이 모두 남여를 탔던 것이다. 남여는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인데, 의자의 양쪽으로 긴 나무가 붙어 있어 앞뒤에서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되어 있다. 평지는 물론 산길과 같은 좁은 길을 오갈 때도 이용했다. 정엽 일행의 산길 이동을 위해 승려 수십 명이 동원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금강산 중’이다. 가마를 메는 중들은 푸른 눈에 야윈 얼굴로 겉모습부터 속세인과 달랐으니, 가파른 산길에 가마 메기에 이력이 나 외모부터 평상인과 달라진 것이다. 정엽은 자신의 몸집이 비대해서 가마를 멘 중들이 비오듯 땀을 흘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했다.
 

▲ 권상일 부사가 가마타고 넘은 운문고개(1872년 ‘청도군지도’ 부분).
▲ 권상일 부사가 가마타고 넘은 운문고개(1872년 ‘청도군지도’ 부분).

◇다산의 시 ‘가마꾼의 탄식’

다산 정약용은 60행(行)에 이르는 장편 한시 ‘가마꾼의 탄식(肩輿歎, 견여탄)’을 지어 저들의 고통스런 부역을 고발했다. 그 몇몇 부분을 번역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가마타기 좋은 줄만 알고, 메는 사람 고통은 알지 못한다.… 역마 타고 내려온 문한(文翰) 관리를, 너희들이 어찌 모시지 않으랴? 부리는 아전은 채찍과 매를 잡고, 주지 스님은 가마꾼을 짝지운다.… 헐떡이는 숨소리는 물여울 소리에 뒤섞이고, 헤어진 적삼에는 땀이 흠뻑 젖는다. 움푹한 곳 건널 땐 옆 사람이 받쳐주고, 가파른 곳 오를 땐 앞 사람이 몸 굽힌다.… 새끼줄에 짓눌려 어깨엔 홈 파이고, 돌멩이에 멍든 발은 아직도 낫지 않네. 자기 몸 병들면서 남의 몸 편케 하니, 너희가 맡은 일이 당나귀나 말과 같구나.… 내 이 때문에 견여도(肩輿圖)를 그려서, 임금님께 바치려 하노라.”

견여도는 가마 메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송(宋)나라 신종 때 정협(鄭俠)이라는 진사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성문 수문장으로 있던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었는데, 수많은 백성이 수척한 몰골로 떠돌아 다니고, 끼니도 잇지 못하면서 옹기와 나무를 팔아 관아에 빚을 갚고 있었다. 신법이 잘못 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들의 참담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상소문과 함께 바치니 황제는 신법을 폐지했고, 그 즉시 단비가 내렸다 한다. 정협의 이 그림을 유민도(流民圖)라 한다.

다산의 시에는 높은 신분 귀족들은 가마꾼 고통을 몰라주고, 지방관과 아전들은 주지 승을 시켜 노역을 맡긴다. 가마꾼의 위험한 걸음은 아슬아슬해서 읽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당나귀나 말과 다름없는 이들의 노역을, 다산은 이 유민도 고사를 거울 삼아 견여도를 그려 올려 임금께서 가마꾼의 고역을 살펴주시라 하겠다 했다.

다음은 영조 연간에 울산부사를 지낸 권상일(權相一·1679~1759)의 <청대일기> 중 한 대목이다. “영조 13년(1737) 5월 초6일. 순영(巡營)을 향해 출발했다. 낮에 언양에서 점심을 먹었다. 현감과 함께 비근당(卑近堂)에 앉으니 경치가 아늑하였다.… 석남사(碩南寺)에서 숙박했는데, 운문산 아래 있는 절이다.…” 순영은 대구에 있는 경상도관찰사 집무소 감영(監營)을 말한다. 순영으로 가는 도중 언양현에 들러 점심을 먹고 비근당에서 현감을 만나 대화한 후 석남사에 들러 숙박했던 것이다. 卑近堂은 언양현 동헌 평근당(平近堂), 숙박한 碩南寺는 가지산 석남사(石南寺)이다.

▲ 정엽의 ‘금강록’ 일부. ‘말이 갈 수 없어 남여를 탔거나, 가마를 멘 중이 비오듯 땀을 흘리니 내가 비대해서 고생하는 모양’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 정엽의 ‘금강록’ 일부. ‘말이 갈 수 없어 남여를 탔거나, 가마를 멘 중이 비오듯 땀을 흘리니 내가 비대해서 고생하는 모양’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울산부사 권상일의 운문재 넘기

다음은 그 이튿날의 일기이다. “초7일. 이슬비가 내렸다. 견여(肩輿)를 타고 북쪽으로 오르니 길이 몹시 험준했다. 중들이 교대로 견여를 메는데, 모두 어깨를 쉬면서 땀을 흘리니 너무 가엾다. 속으로 가만히 주자(朱子)의 “이렇게 한 까닭이 참으로 분명하다”는 싯귀를 외우면서 말로 바꾸어 타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으니 가히 한탄스럽다.…” 견여는 남여의 다른 말이다. ‘어깨로 메는 가마’라는 뜻이다.

이튿날 북쪽으로 청도로 가는 운문재(雲門嶺, 운문령)를 넘는데, 석남사 중들이 견여를 메었다. 산길이 험하고 힘이 들어 모두 땀을 흘리는데, 너무 가엾어서 주자의 시를 외우면서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산길에서의 말타기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외웠다는 주자의 시는 무엇인가?

“지친 가마꾼 마음 아파 말로 바꾸어 타니/ 이렇게 한 까닭은 참으로 분명하다./ 맨발에 헐벗은 몸 애처로워라/ 이런 생각 넓혀가면 천하가 평안해지리.(爲悶人疲上馬行, 此時消息分明. 更憐跣足無衣苦, 充此直敎天下平)” 주자가 가마에서 내려 말로 바꾸어 탄 것은 맨발에 헐벗은 몸으로 가마를 메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였다. 고생으로 지친 가마꾼을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는 법이니, 이 마음을 확충해 가면 천하가 평안해지리라는 것이었다. 부사는 말 타기에 익숙지 않아 주자의 뜻을 받들지 못해 부끄러웠던 것이다.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날 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산 아래로 내려와 숙사에 이르니 운문사(雲門寺) 중들이 가마를 가지고 왔다. 다시 가마를 타고 동구로 내려가 ○○○마을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운문사에서 숙박했으니, 이 절은 청도군 동쪽 호거산 아래에 있다. 운문사를 둘러보면서 중이 설명하는 창건과 중창 내력을 들었다.…” 이처럼 부사가 운문재를 넘어 청도에 이르니 운문사 중들이 어느새 가마를 준비하여 대령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고위 관원의 행차에 -산길이든, 평지이든- 많은 경우 인근 절의 중들이 가마를 메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계속되면서 승려를 천민으로 취급한 데다, 절의 생존이 중앙과 지방 관원의 세금과 부역 감면 등 각종의 시혜(施惠)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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