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언양향교의 위치와 반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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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언양향교의 위치와 반월산
  • 경상일보
  • 승인 2021.10.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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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철호 울산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언양향교는 대략 조선 초기에 이미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증보문헌비고> ‘학교고(學校考) 향학 조’의 ‘세종 원년(1419)부터 군 이하의 향교에 훈도를 두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생원·진사로서 관찰사가 4서2경으로 시험 보아 뽑은 자들이다. 같은 해 12년(1430)에는 언양에 교도를 파견했다. 500호 이상 되는 고을에 교도와 훈도를 파견하는 것이 전례인데, 언양이 이제 680호가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8세기 영조 조에 서석린이 서술한 <언양현학기>(彦陽縣學記)에 따르면, ‘향교가 옛날에는 현 서북쪽 3리에 있었는데, 숙종 병자년(22년, 1696)에 현 남쪽 3리 옛터로 이건했으니 이것이 오늘의 향교다는 말이 떠돈다’라고 하였다. 이어 ‘고을 장로들에게 전해오는 이 이야기를 징험하니, 서북쪽은 곧 화장산이요 남쪽은 덕천이다’라고 했다. ‘덕천→화장산→덕천’으로 이건했음을 알 수 있다. 덕천으로 다시 옮긴 해(숙종 22년, 1696)에 먼저 대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다른 기록을 보면 ‘향교 유허는 위열공 김취려가 거주한 송북 옛 마을에 있었는데, 송북의 향교는 덕천의 향교보다 앞서고, 덕천의 향교는 화장산 향교보다 앞선다’라고 했다. 손후익의 <향교중수기>(1937)에 따르면 언양에는 향교가 처음 군 북쪽 1리쯤의 반월산 아래 있었고, 남천 남쪽 3리쯤의 덕천으로 옮겼다가 성 서쪽 2리쯤의 화장산으로 다시 옮겼고, 숙종 22년에 마지막으로 덕천으로 옮겼다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반월산은 ‘김취려가 거주한 송북의 옛 마을’에 있는 산이다.

이상의 결과 언양향교의 최초 설립지는 언양읍성 북쪽 1리 반월산 기슭임을 알 수 있다. 반월산 기슭에 있던 향교는 이후 읍성 남쪽 3리 덕천(德泉)으로 옮겼다가 다시 읍성 서쪽 2리 화장산으로, 화장산에서 다시 덕천으로 이건(移建)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서쪽 2리 화장산은 지금의 송대리 귀깃골로 언양성당이 있는 곳이다. 예전에 향교가 있었다고 하여 귀깃골을 구교동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덕천은 지금의 삼남읍 교동리의 옛 이름이다. 덕천은 덕천역에서 나온 말이다. 덕천역(德川驛)은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설치되었던 역참(驛站)이다. 그렇다면 언양향교의 최초 설립지인 반월산의 구체적 위치는 어디일까? 반월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반월산은 읍성 북쪽 1리에 있다고 했다. 1리는 대략 400m 정도이다. 읍성에서 북쪽으로 400m 지점은 지금의 경남아너스빌 위치이거나 조금 지난 지점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현재 산이 없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고려말 조선 초기에는 산이 있었느냐이다. 경남아너스빌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 송대리 안골이다. 안골은 내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송대리에서 으뜸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 와우형, 곧 소가 누운 모습의 산이 있었는데, 그 안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송대라는 이름은 안골(內谷) 앞에 있는 산이 마치 소가 누운 것 같다 하여 ‘소뒤’라 부르다가 ‘소디’가 되었는데, 이를 고쳐 ‘송대’라 한 데서 유래했다. 송대·송동·송북(松北)은 모두 순우리말 땅이름인 ‘소디’를 이르는 한자 지명으로, 송(松)은 옛 음이 ‘소’로 솔다·좁다는 뜻이며, ‘북’(北)은 옛말에 ‘뒤’(디)를 이르므로 곧 마을이나 들(野)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근 송대리 내곡에 오랫동안 사신 노인들에게서 지금 경남아너스빌이 있는 곳이 예전에는 공동묘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공동묘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내곡마을 앞에 와우형의 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치상 읍성 북방 1리쯤이다. 누운 소의 모습은 그 몸통만 보면 반달(半月)과 비슷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600여 년 전에는 누운 소의 모습을 한 산이 있었고, 그 산의 이름이 반월산(半月山)이 아니었을까. 지역 노인들의 증언과도 일치하고 ‘향교 유허는 위열공 김취려가 거주한 송북 옛 마을에 있었다’라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송철호 울산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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