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유배지에 세워진 유일한 서원 그의 유업 받들어 제대로 되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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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유배지에 세워진 유일한 서원 그의 유업 받들어 제대로 되살려야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1.11.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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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서원 사당과 강당. 내삼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다.

울산 사림은 1677년(숙종 3)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건립하고, 두 해 지난 1679년에 두 선현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1682년(동 8년) 부터 사액(賜額) 청원을 벌였다. 사액은 국왕이 서원의 편액을 하사하는 일인데, 성사되면 국왕이 공인한 서원이 되어 지역사회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더불어 소유 토지를 3결(結)까지 면세하고, 원생(院生) 20명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받는다. 청원은 우여곡절 끝에 1694년(동 20) 성사되어 사액 구강서원이 태어났다.



◇포은을 선점한 구강서원

다음은 이채(李埰)가 찬술한 구강서원 ‘청액상소문’의 일부이다. 이채는 회재의 현손으로 구강서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언양은 우리 울산의 속현(屬縣)이었는데, 포은선생께서 이곳에 2년 여를 적거(謫居)했습니다. 이로써 울산이 백대(百代)를 전해오면서 흥기하고 있으니 큰 선현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합니다.…” 구강서원에 포은을 모신 연유를 말하고 있다.

‘백대를 전해오는 포은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학문으로는 성리학(性理學)의 조종(祖宗)이요, 행실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이다. 포은이 성균관에서 사성으로서 강론할 때 대사성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이르기를, “달가(達可, 정몽주의 자)의 논리는 횡설수설해도 모두가 이치에 맞다” 하고 그를 동방 이학지조(理學之祖)로 추장했다. 이학이 바로 성리학이다. 포은이 고려 왕조를 지탱하려다 이방원 일당에게 선죽교에서 피살, 순절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이 있으랴’는 충절이 이것이다.

위 상소문에서 ‘포은선생께서 울산의 속현 언양에 2년 여를 적거해서…’ 대목을 새겨보자. 속현은 작은 고을을 이웃 큰 고을에 소속시켜 존립하게 한 행정단위이다. 이때 큰 고을을 주현(主縣)이라 한다. 이럴 경우 속현은 토착 향리가 다스리고 주현 수령이 향리를 감독하는 상-하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양현은 신라 경덕왕 이래 양주(양산)의 속현이었는데, 1018년(고려 현종 9) 울주(울산)의 속현이 되었다가, 120여년 후 수령이 파견되어 주현으로 승격되었다. 울산 사림은 포은이 속현 언양에 유배온 적이 있다는 구차한 구실로 봉향하는 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포은의 유배지 언양에서는 30여년 후 1713년(숙종 39)에 반구서원을 건립하여 봉향했다. 사림의 규모와 경제력에서 언양의 읍세(邑勢)가 울산에 비해 턱없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미 구강서원에 봉향한 회재와 더불어 한강 정구(寒岡 鄭逑)를 더해 세 분을 모셨는데, 이는 동일한 인물을 중복해 모시는 서원 첩설을 금했기 때문이다. 반구서원 사액은 언양현의 입지와 사림의 세력으로 보아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포은의 유업과 반구서원의 오늘

언양에서 포은을 봉향한 연유는 김지(金志)가 서술한 ‘반구서원창건록’에 이렇게 실려있다. “고려 말 포은선생께서 권신의 모함으로 언양에 유배오시어 반구대를 소요하셨다. 선생의 풍류가 어제 일과 같아 오늘도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한다.”

포은이 친원파와 대립하다 1376년(고려 우왕 2) 언양에 유배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배 당시 언양현 치소(治所)는 오늘의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였다. 필자는 최근 그의 적소(謫所)가 치소 인근 향산리의 한 민가이며, 여기서 마을 청년들을 가르쳤음을 밝힌 바 있다.(본보 2021년 4월2일자) 당시 유배 죄인은 이웃 고을로 이동하지 않는 한 운신이 자유로웠고, 현지 수령 또한 유배 온 고관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포은이 언양현 경내의 명승지 반구대를 소요했다는 김지의 기록과 작괘천을 유람했다는 주민들의 구전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포은의 언양과의 이런 인연을 감안한다면 먼저 서원을 세워 봉향해야 할 곳은 마땅히 언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세한 울산이 언양을 속현으로 둔 적이 있다는 명분으로 포은을 선점했던 것이다.

반구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고, 언양 사림은 애석한 마음으로 그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1955년 이 자리에 제단을 축조해 세 분을 제향했는데, 이마저도 1965년 사연댐이 축조되면서 수몰되었고, 유허비는 북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이후 서원은 수몰지 보상금과 유지들의 헌금 및 소유재산으로 부지를 매입해서 1970년 강당과 고자실을, 1983년 사당과 지숙문, 지의문을 건립하여 중건되었다. 이후 보수와 정비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허비는 2004년 ‘반구서원유허비’ 3기로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되었다.

중건한 반구서원은 애초에 서원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외삼문은 앞길에 바로 붙어있고, 강당 지붕은 담장과 맞닿아 있다. 사당 역시 내삼문을 사이에 두고 강당에 닿아있고, 동재와 서재는 건립하지도 못했다. 강당 안에는 중건 당시의 기문을 새긴 현판 4개와 성금을 낸 유지들 명단이 걸려있을 뿐 정작 중요한 ‘반구서원창건록’ ‘반구서원상량문’ ‘반구서원중수기’ 현판은 찾아볼 수 없다.

▲ 반구서원 유허비. 지난 2004년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되었다.



◇포은의 유배지 서원으로 현양해야

포은을 주향(主享)으로 모신 서원은 3개소가 있다. 1554년(명종 9) 생장지 영천에 세운 임고서원, 1573년(선조 6) 선생이 순절한 개성 선죽교 위쪽에 세운 숭양서원, 그리고 1576년(동 9) 묘소 소재지 용인에 세운 충렬서원이 그것이다. 선생의 유배지에 세운 서원은 반구서원이 유일하다.

국보 반구대암각화를 끼고 있는 산이 반구서원 소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암각화를 새긴 암벽은 지목(地目)이 하천이어서 국유이다. 서원측에서 이건, 혹은 중건할 경비를 마련하려 산을 매각하려 하면 매수자가 나서지 않는다 한다. 국보가 걸쳐있어 개발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반구서원은 사연댐 축조와 국보 지정이라는 국가적 사업에 희생되어 하염없이 쇠락해 가고 있다.

다음은 울산의 마지막 유학자 창릉 박용진(蒼菱 朴墉鎭) 선생께서 1984년 찬술하신 ‘반구서원중건기’의 마지막 일절이다. “이 글 말미에 한 가지 덧붙이는 것은 서원 중건에 참여한 여러 현자(賢者)들이 지금은 모두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중건한 후 수리하고 보전하는 일은 미래의 젊은이들 몫이다.”

40여년 전의 현자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고, 보전은 우리 시민과 지차체의 몫이다. 지난 5월 ‘울산 반구천 일원’이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이 ‘명승’에 걸맞게 반구서원을 되살려 유배지 언양에 유업을 남기신 포은선생을 현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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