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내가 낸데’를 버리자 비로소 새로운 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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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내가 낸데’를 버리자 비로소 새로운 일이 찾아왔다
  • 경상일보
  • 승인 2021.12.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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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춘 전 울산경찰청 마약수사대장

올해 6월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평소 알고 지내던 변호사 사무장들에게서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가 끊이질 않았다. 경찰관 생활 대부분을 형사사건만 취급하였던 터라 서로 죽이 잘 맞을 거라는 생각에서일 게다. 본의 아니게 과분하고 고마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그분들께 죄송하다. 이제 그분들의 제의를 거절한 이유와 백수생활을 청산하게 된 사연을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남에게 신세지고 부탁하는 일에는 타고난 기질이 없다. 눈치가 없어 잇속 챙기는 일에도 약삭빠르지 않다. 그래서 돈벌이와 말발이 능숙한 사무장 일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월급도둑’이란 소릴 들을 게 뻔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과 동기 부여가 절실했다. 그동안 얽매였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나를 되돌아보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방법으로는 나 혼자 여러 날 걸으면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게 좋을 듯 했다. 퇴직 다음날 아침, 750㎞ 동해안 해파랑길을 나섰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내가 낸데’ 하는 굽히지 않으려는 사심부터 버리기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종착지에 도착했을 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도 기대 되었다. 집을 떠난 지 73일 만에 종착지 고성 통일전망대에 섰다. 성취감과 뿌듯함도 잠시 허탈감이 몰려왔다. 한여름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게걸음으로 걷던 일, 길을 잃고 반나절이나 역주행을 하던 일, 너울성 파도를 뒤집어쓰고는 포기 직전까지 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해파랑길을 완주하고도 뭔가 모르게 허전했다. 그래서 이번엔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해파랑길에서 단련된 굳은살 덕분에 힘든 줄을 몰랐다. 정상에는 해무가 몰려와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기대했던 백록담은 볼 수 없었다. 늘 그 곳에 있지만 안 보인 것뿐이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어쨌든 한라산을 오르고 나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편한 마음으로 올레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평소 내게 형이라 불러주는 울산의 중견기업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느닷없이 자기 회사 정문 경비를 서달라는 거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시간을 갖고 한번 고민을 해보겠다고 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순간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이건대 정작 나 자신은 모르고 지나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기다리던 대표의 전화번호가 울렸다. 고민은 그만하고 다음 달부터 출근을 해달라는 거였다. 감지덕지한 일이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왠지 머뭇거려졌다. 며칠 뒤 그 대표와 저녁 자리에 갖게 됐다. 모든 쓸데없는 자존심과 ‘내가 낸데’하는 마음은 버리기로 마음 먹고는 대표를 만났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확인하고는 난 나에 대한 대우를 더 낮추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대표의 요청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내가 낸데’를 조금이나마 버렸던 결과다.

나의 업무는 회사 정문을 지키는 경비다. 경비구역 내에서는 ‘경찰관 직무 집행’과는 다르지 않다. 내가 평생을 했던 일이라 이골이 날 정도로 몸에 푹 배어 어려울 건 없다. 오늘이 입사 10여일 째다. 출근길이 기다려진다.

박정춘 전 울산경찰청 마약수사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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