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게해 연안을 향해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에페수스(Ephesus)로 향한다. 로마도시의 유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터키 땅에서 에게해에 면한 도시들이 대개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가지고 있듯이 이곳 또한 그리스, 로마의 문명에서 시작된 도시다.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이미 에게해를 건너온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폴리스)를 건설했고, 기원전 1세기에는 그 지배권이 로마로 넘어갔으며, 4세기부터는 동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서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 또는 비잔틴 유적을 만난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00년의 세월을 건너질러 로마도시 에페수스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언덕 밑에 폐허가 된 유적 사이로 미끈한 이오니아식 기둥들이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간간이 남은 축대와 벽, 그리고 유려한 아치문과 대리석 기둥들이 더 자극적이다. 뜯겨나간 보물지도에서 퍼즐조각을 맞추는 기분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헤라클레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비밀의 봉인은 한꺼번에 해체된다. 계곡 사이로 길게 뻗은 대리석 포장도로, 양편에 서 있는 가로변의 대리석 건물들, 그리고 그 길의 단부에 서있는 거대한 도서관의 위용. 번영했던 로마도시 에페수스의 한복판으로 순간 이동한다. 그 생생한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다른 시대의 유적이 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로마 도시. 그곳에서 시간은 7세기 이전에 멈추어 있다. 터키에서 이만큼 완결적인 로마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유적이 있었던가.

에게해에 면한 도시 중에서도 에페수스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지중해 권역의 여러 지역과 무역을 통해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전성기 인구가 25만명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 경관은 도로에서부터 ‘부티’를 드러낸다. 대리석으로 포장한 중심가로는 마차 다니는 길과 인도가 구분되었고, 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가로변에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밤거리를 밝혔는데, 당시 가로등이 있었던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정도였다.
항구로 이어지는 대로변에는 상점가가 형성되어 곡물과 생선, 야채는 물론 외국에서 들여 온 보석과 화장품이 즐비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조차 여기에서 쇼핑을 즐겼다고 하니 대도시 중심상업지구의 명품가로였음이 분명하다. 지중해를 누비던 뱃사람들도 이 화려한 항구 도시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을 터. 항구에는 술집과 유곽이 늘어섰고 여자의 얼굴과 심장, 발모양을 음각한 광고 석판을 설치하여 손님을 유혹했다.
주택가는 언덕 사면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대지를 조성하여 지었는데, 높은 곳은 상류계층이 차지했다. 아랫단에는 테라스 하우스 형식의 집합주거도 볼 수 있다. 좁은 공간에서 주호 밀도를 높이기 위한 주거방식이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만든 벽과 아치들이 지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주택가 주변에는 공동우물, 수세식 오물처리 장치를 갖는 공중화장실, 호화로운 목욕탕 등 근린생활시설도 갖추었다.
공공시설에서 도시생활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토론과 소통을 위한 광장이 설치됐고,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설도 볼 수 있다. 음악공연을 위한 소극장 ‘오데온’을 지었고, 연극을 공연했던 원형극장은 2만5000명을 수용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여러 공공시설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시설은 역시 도서관이다.
셀시우스 도서관, 로마 집정관이었던 셀시우스(Clesus)가 2세기에 사재를 털어 건립한 도서관이다. 로마제국을 통틀어 유일한 공립도서관이었다. 그는 당시 로마제국 전체에서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뭄에 이어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도서관을 지었다. 만권 이상의 두루마리 문서를 소장했다고 하니, 이 도시는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기반을 갖춘 도시였음에 분명하다.
도서관은 마치 조선시대 광화문처럼 중심가로의 단부에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다. 너무도 위풍당당하고, 아름답고, 우아하여 궁전으로 착각할 정도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층의 높이가 2개 층에 해당할 만큼 높다. 자세히 보면 1층부와 2층부의 기둥이 높이나 굵기가 다르다. 2층부를 보다 가볍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화려한 자연 무늬로 장식된 대리석 기둥들이 짝을 지어 3개의 출입구 사이에 있는 벽을 강조한다. 4개의 벽에는 감실(nich)을 만들어 인물 조각상을 배치했다. 마치 각 인물상이 독립된 지붕을 갖는 집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각기 지혜(sophia)와 지식(episteme), 지성(ennonia)과 덕성(arete)을 상징하는 인물상이다.
이렇게 유려한 장식성과 균형감, 입면의 구성미는 그리스 건축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로마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 80,70BC~15 BC)는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건축의 원리를 정립했고, 그 원리에 따라 극장이나 도서관 같은 건축이 디자인되었다. 셀시우스 도서관은 이러한 전형적 건축수법의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건축적 원리는 중세시대에 잠시 잊혔다가 르네상스를 통해 재현되면서 서양건축의 고전적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도서관은 지식과 학문의 상징이다. 도서관이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되면 지식은 지배의 도구가 되지만, 대중화되면 사회발전의 기폭제로 기능하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토양이 된다. 왕궁이나 신전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공공도서관을 건설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의 잠재력과 위상을 대변한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