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시간 속에서 광석을 캐낸다는 건
상태바
[기고]시간 속에서 광석을 캐낸다는 건
  • 경상일보
  • 승인 2021.12.21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안현정 울산 중앙초등학교 교사

코로나 속에 갇혀 두 해를 보내며, ‘교사인 나는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교실에 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오늘따라 교실에 퐁당퐁당 비워진 자리가 눈에 띈다. 악몽이 되살아난다. 원격수업이 진행될 때 아이들이 줌으로 접속해 들어오지 않아서, 아침마다 집으로 보호자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던 때가 있었다.

가정 사정에 따라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학교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아이들이 있다.

모닝콜 하는 것이 당연하게 돼버린 우리반 지연이는 수학 시간에 내가 외계인이 된 기분이 들게 한다. 외계인이 ‘삐리리 띠띠’ 열심히 말을 하는데, 지연이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이고 언어다. 나를 바라보고 듣고 있지만 서로 마음이 와닿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연이는 수업을 마치면 학력 향상 반에 가서 수학 공부를 하고 집에 갔다. 그래도, 방과 후 지연이가 기초 학습을 익히는데, 도움 받을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연아, 2학년 때 배운 구구단을 먼저 외워야 해!”라며, 지연이가 스스로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시간에 쫓겨 그냥 보내곤 했었다. 3학년 1학기가 지나도 구구단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2단, 3단 연습하고 외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지연이는 이틀에 한 번씩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고 갔다. 시작한 지 며칠 안됐을 때의 일이었다. 지연이는 남아서 공부하기 싫은데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데 곱셈식을 풀려니 죽을 맛이었다. 지연이도 나도 이슬로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힘들기 시작했다. 바둑돌을 세면서 구구단을 외는 지연이는 갈 길이 멀고도 험난했다.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등산객 같았다. 그것도 발에 모래주머니를 몇 개나 차고 말이다.

두 달쯤 지나자 지연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가슴에 응어리지며 눈물을 머금고야 말았다. 얼마나 스스로가 답답했으면, 수학 문제를 앞에 두고 눈물이 날까 안쓰러웠지만, 난 그 눈물이 반가웠다. 모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고, 지연이의 눈물이 고마웠다.

“지연아, 풀고 싶은 데 못 풀어서 우니?” 지연이의 큰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수학 시간에 구구단도 모르는 답답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복잡해진 마음을 내려놓고 일신우일신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2학년 기초학습으로 돌아갔고, 지연이는 바둑알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구구단을 아니까 문제가 좀 쉽게 풀리기 시작했으나 지연이는 잘 느끼지 못했다.

어느덧 4개월째, 지연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해요, 수업 시간에 몰랐던 문제가 풀리니까요.” 시들어 고개 숙인 해바라기가 꿈틀대며 얼굴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지연이는 공부 자체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공부라는 울타리 밖에서 소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는 지연이가 여러 종류의 톡 이모티콘이 가득한 스티커 1장을 내밀었다. “이걸 왜 선생님한테 줘?” 물으니, 지연이는 “그냥요, 선생님 드리고 싶어서요” 하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이정표가 있어도 길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이정표 없는 길을 혼자 가고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만났구나!’ 우리의 만남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져 왔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서 광석을 캐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현정 울산 중앙초등학교 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도시철도 1호선, 정차역 총 15개 조성
  • ‘녹슬고 벗겨진’ 대왕암 출렁다리 이용객 가슴 철렁
  • 울산 동구 주민도 잘 모르는 이 비경…울산시민 모두가 즐기게 만든다
  • [창간35주년/울산, 또 한번 대한민국 산업부흥 이끈다]3년뒤 가동 年900억 생산효과…울산 미래먹거리 책임질 열쇠
  • 제2의 여수 밤바다 노렸는데…‘장생포차’ 흐지부지
  • [울산 핫플‘여기 어때’](5)태화강 국가정원 - 6천만송이 꽃·테마정원 갖춘 힐링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