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숙의 한국100탑(57)]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
상태바
[배혜숙의 한국100탑(57)]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
  • 경상일보
  • 승인 2021.12.24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배혜숙 수필가

문학동아리에 가입은 했지만 적응을 못해 겉돌기만 할 때였다. 키가 멀대같은 동아리 선배는 탑이 있는 효자리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언제든 찾아오면 멋진 탑을 보여 주겠노라 했다. 희미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수곡면 효자리로 향한다.

2008년, 석탑의 주변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묘엄사(妙嚴寺)명 기와편이 발굴되었다. 고려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효자리 삼층석탑은 ‘묘엄사지 삼층석탑(사진)’이란 제 이름을 찾았다. 묘엄사가 있었던 폐사지에는 마을이 들어섰다. 절터의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석을 비롯한 많은 석재들은 오랜 세월 효자리 사람들을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더러는 번듯한 기와집의 초석이 되고 돌담의 굄돌로 변했다. 어느 집에선 장독대를 받쳐 장맛을 돋우고 사랑방의 섬돌로 놓였다.

마을의 한 쪽을 차지한 삼층석탑을 보며 꿈을 키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 고향을 떠났다. 여느 시골처럼 동네는 텅 비어 입구에서부터 고적감이 밀려온다. 탑과 이웃한 집에도 정적이 흐른다. 햇빛이 진종일 머물다 가는 마당에 채를 썬 무가 채반에서 꾸들꾸들 말라가고 있다. 키가 4.6m인 우직한 석탑은 혹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웃기웃 고개를 내민다. 나도 골목길에서 탑을 향해 목을 쑥 뺀다.

삼층석탑의 일층 몸돌에 문비가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다.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묘엄사에 대한 오묘한 설화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진주를 상징하는 논개나 김시민 장군에 대한 소설을 써보리라 벼르던 스물 두어 살 그때, 탑골에 사는 선배가 묘엄사지 삼층석탑을 소개 했다면 ‘묘엄’이란 단어에 홀려 수곡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지도 모른다. 문비를 마주하고 겨울 햇살을 등에 받고 앉아 있으니 나른해진다. 나를 대신해 삼층석탑이 동화 한 편을 써 내리고 있다. 꿈에 취한 듯 읽어 내린다.

돌아오는 길에 남강 변에 사는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 고향을 지켜온 그녀가 삼층석탑처럼 보였다. ‘묘엄’은 탑골이 아닌 남강에도 묘하게 흘렀다.

배혜숙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대형 개발로 울산 해양관광 재도약 모색
  • [기자수첩]폭염 속 무너지는 질서…여름철 도시의 민낯
  • 신입공채 돌연 중단…투자 외 지출 줄이고…생산직 권고사직…허리띠 졸라매는 울산 석유화학업계
  • 아마존·SK, 7조규모 AI데이터센터 울산에
  • 울산, 75세이상 버스 무료 교통카드 발급 순항
  • 방어진항 쓰레기로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