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5)]제주와 엑상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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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5)]제주와 엑상프로방스
  • 경상일보
  • 승인 2022.01.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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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

제주에서 살아가려면 바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은 어디에서나 불지만 제주의 바람은 육지의 그것과 다르다. 육지에서는 태풍으로나 겪는 거센 비바람을 이 섬에서는 여름내내 견뎌야 했다. 지난 여름에는 유별나게 바람이 불었다. 버스정류소에서 함께 기다리던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6월부터 시작된 비바람이 9월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섬 바람의 강도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제주의 여름 날씨는 불편함 그 이상이었다. 잠자리는 곧 창문을 넘고 들어올 것 같은 바람소리 때문에 여러 날 편치 않았다. 육지의 비바람은 하루나 이틀을 넘지 않지만 섬에서는 일주일 내내 계속되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하는 일이 옆집의 밭에 가지가 휘도록 매달려 있는 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별 탈 없이 매달려 있는 노란 열매가 늘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제주의 밭에는 왜 귤나무만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주의 바람을 견디어낼 과일 나무는 키 작은 귤나무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지리 시간에 배운 방풍림의 의미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키 작은 귤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밭둑에 심어져 있는 전나무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바람 속에서 직접 확인하면서다.

그래도 사람들은 제주로 몰려오고 제주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 매력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가장 경관 좋은 바닷가에 위치한 호텔 주변을 지나치다 보면 많은 여행객들과 마주친다. 국내에서 이만한 풍경과 숙박시설을 갖춘 휴양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면 약간은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정학적인 환경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유럽이나 가까운 동남아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우리나라의 엑상프로방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도시임은 분명하다. 프랑스 남쪽에 위치한 도시 엑상프로방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물의 도시다. 프랑스에서 누군가에게 Aix(엑스)를 아느냐고 물으면 대개 엑상프로방스를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Aix(엑스)는 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러나 엑상프로방스를 소개하는 관광안내서를 보면 어디에도 거대한 역사적 유물이나 장엄한 풍경은 없다. 그 대신 아름다운 햇빛이 북유럽의 하염없이 흐린 하늘과 영원한 가랑비에 지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소개하고 있다. 파리 사람들은 “햇빛”이라고 외치며 프로방스의 하늘을 쳐다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엑상프로방스를 소개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말이다. 그처럼 엑상프로방스는 문명의 편리함과는 거리가 있는 헐벗은 풍경으로 사람을 부르는 도시인 것 같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가 프로방스의 햇빛과 풍경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주에는 혼자서 또 여럿이 즐길 수 있는 길이 있어 좋다. 어떤 사람은 오름을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올레길을 걷는다. 맑은 가을날 걷는 제주의 바닷길 풍경은 혼자 걷는 외로움을 잊기에 충분하다. 걷는다는 것은 어느 시간 동안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끝없이 이어진 바닷길을 걷는다고 해서 세상이 지워준 버거운 짐들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걷는 동안은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하면서 복잡한 도시의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다보면 무뎌진 감각들도 조금씩은 깨어나고 헝클어진 생각을 다시 이어가는 힘도 생긴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걷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엑상프로방스를 말하면서 헐벗은 전라의 풍경을 떠올리듯이 우리도 아직은 제주를 생각하면서 비어있는 거리와 이국적인 가로수 그리고 헐거운 풍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지금 제주는 끊임없이 채워지고 있다. 아름다운 바닷길이 호텔 공사로 막혀버리고 산 중턱마다 펜션이 들어서고 있다. 자연이 지워진 꽉 찬 제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제주는 이미 없어진지도 모른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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