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벼루를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방으로 취직자리를 수소문하다 평소 내 손재주를 눈여겨보던 스승님이 벼루 한 번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해서 시작한 일이지. 그때는 전등도 없는 컴컴한 곳에 앉아 돌을 다듬으면서 벼루를 만들었는데 이상하게 차분해지면서 성취감이 생기더라고. 그날 밤 벼루 돌을 끌어안고 잤더니 취직 생각은 달아나고, 벼루를 또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울산시 무형문화재 벼루장 유길훈 장인은 1969년 스승 김인수 선생과의 첫 만남 이후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루를 만드는 외길 인생을 살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유 장인은 6·25 전쟁으로 어머니·형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충북 증평에 정착했다. 이때만 해도 울산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뻔했다.
울산과 유 장인의 인연을 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1992년 한중 국교 수립이다. 품질이 좋다고 말로만 전해 들었지 수입이 어려워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중국 ‘단계연’이 필방으로 쏟아진 것이다.
“당시는 벼루는 물론이고,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였는데, 이런 것들을 만드는 장인은 물론이고 공방들이 된서리를 맞은 거지. 저렴한 것부터 부르는 게 가격인 최고급 중국산까지 넘쳐나니까 버텨내질 못했어. 그때 전국에 벼루장만 1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두 손에 꼽히는 정도로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결국 단계연에 필적한 새로운 벼루돌을 찾기 위해 고문서를 뒤져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무렵 딸도 경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울산을 탐석하다 2001년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에서 언양록석을 만났다.
유 장인은 단계연보다 좋은 벼루 돌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반구대에서 푸른빛이 도는 돌, 물을 흡수를 하지 않아 먹이 잘 갈리는 돌을 마침내 찾아냈다. 공교롭게도 이 일대 암벽에는 벼루길(연로·硯路)을 만들었다는 연로 개수기(硯路 改修記)도 새겨져 있다. 벼루를 만드는 데 최적인 장소다.
“이곳에 공방을 차려 놓고 벼루를 만들기 시작했죠. 이곳에서 나오는 돌로 만든 벼루가 단계연보다 좋다며 교환해 간 사람도 있을 정도로 품질이 보장된다고 할까요.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는 물론이고, 중소도시 구석구석까지 언양록석으로 만든 벼루가 다 퍼져 있어요. 젊은 시절 울산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도 유튜브로 언양록석 벼루를 보고 지인을 통해 사갈 정도라니까요.”
유 장인은 이렇게 말했지만, 내심 벼루와 전통문화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아쉬워했다. 전승자가 사라지는 것도 걱정거리인 눈치다. “제 뒤는 아들 은해가 잇기로 했어요. 처음 전승하겠다고 찾아온 후계자가 달아난 뒤 아들도 답답했는지 지난해 6월 멀쩡히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벼루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어요. 가난의 대물림이 될 것 같아서 전수 장학생 신청하는 것을 두고 아내와 한 달가량 고민했지만, 아들 고집을 꺾을 수 없더라고요.”
유은해씨는 “소상공인들처럼 매출이 많이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 명성을 이어가고 싶어서 늦기 전에 도전하기로 했다. 곧 공방을 울주군 언양읍 다개리로 이전해야 하는데 새로운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출퇴근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전상헌기자 honey@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