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천재 최성곤 선수, 日 등 아시아권서도 유명세 ‘한국 최초 축구스타’ 인기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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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천재 최성곤 선수, 日 등 아시아권서도 유명세 ‘한국 최초 축구스타’ 인기몰이
  • 경상일보
  • 승인 2022.01.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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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체육회 한국체육박물관 제공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중구 북정동에는 당시 울산 최고의 부자인 고기업씨, 최신출씨 두분이 계셨다. 양가에는 고래등 같은 여러 채의 기와집이 있었고 대문이 고씨댁은 북쪽으로, 최씨댁은 동쪽으로 나 있었으며 양 대문 앞에는 넓은 타작(打作)마당이 있었다. 고기업씨의 아들 고태진은 조흥은행장과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하셨고, 최신출씨의 아들 최성곤은 오늘의 손흥민에 버금가는 불세출의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다. 1921년생인 고태진은 대한축구협회장, 1922년생인 최성곤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였으니 울산이 축구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울산체육을 이야기 하면 고씨댁과 최씨댁을 빼면 이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연과 기여한 부분이 많다. 축구의 고장 울산이 낳은 불멸의 대스타 최성곤 선수를 기리면서 그의 화려한 일대기와 안타까운 죽음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최초의 축구 스타 최성곤

최성곤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최신출은 울산읍 의원을 한 유지이고 갑부였다.

최성곤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축구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고, 1935년 울산공립보통학교(현 울산초) 졸업 후 보성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로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최고의 드리블 감각과 개인기를 지닌 최성곤은 보성중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최성곤은 부자집 장남에다 잘 생긴 외모와 출중한 실력으로 많은 여성팬을 거느린 한국 최초의 축구 스타였다. 1938년 보성중 최성곤은 17살의 나이에 무패의 기록으로 전국 모든 대회를 석권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40년 전일본 중등학교 축구대회에서 일본 열도를 뒤흔드는 최성곤의 맹활약으로 보성중은 결승전에서 고베중을 4대0으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당시 전일본대회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홋카이도, 도쿄, 오사카, 규슈는 물론이고 사할린, 타이완, 관동주, 조선까지 참가하는 엄청나게 큰 대회였다.

일본 땅에서 젊은 조선인이 해낸 대단한 쾌거였고, 최성곤은 일제강점기 억눌린 민족의 한과 설움을 풀어준 영웅이었다. 특히 결승전에서 빠른 스피드로 수십 미터를 단독 드리블해 넣은 결승골은, 오늘날 손흥민 선수의 골을 연상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그를 ‘조선의 최(崔)’ ‘아시아의 준족’이라 부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실력에다 부자집 아들이라는 소문에 일본에서도 경기 때마다 여성팬을 몰고 다녔다.

1941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진학했다. 당시 울산에서는 최성곤 선수의 개인 응원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부친인 최신출은 보성전문 선수들을 울산으로 전지훈련을 오도록 배려해 북정동 집에 숙식을 제공하며 훈련을 하도록 했다. 북정동 자택은 보성전문 선수들이 모두 생활해도 될 만큼 넓었고 방이 많았다. 보성전문 선수들이 울산에 오면 최성곤 선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자택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꽃다발을 든 여성팬들도 많았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신출 부부는 축구선수인 장남의 뒷바라지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최 선수를 서울에 혼자 두기가 걱정되어 동생인 민곤과 함께 하숙을 시켰고, 여성팬이 많아 그의 어머니는 운동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세심한 배려를 했다.



◇ 아시아 표범 올림픽 무대에 서다

1945년 마침내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을 맞았다. 최성곤은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조선전업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했고, 1947년 상해, 홍콩, 마카오 등으로 원정경기를 하면서 아시아 무대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이때 얻은 별명이 ‘아시아의 표범’이다.

▲ 오흥일 울산광역시체육회 사무처장 울산시 초대·2대 교육위원
▲ 오흥일 울산광역시체육회 사무처장 울산시 초대·2대 교육위원

같은 해 그의 부친 최신출은 아들이 울산에 오면 훈련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경남도 소유의 못을 불하(拂下)받아 매립하고, 나머지 부지는 자신의 논밭을 기부해서 복산동에 약 4000평의 공설운동장(현 중구 B-05 정비구역)을 조성해 지역사회에 기증했다. 최신출 부자의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틋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감격적인 올림픽무대에 서게 됐다. 서울에서 출발해 배와 비행기로 부산과 요코야마, 홍콩 등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런던에 입성했다.

오흥일 울산광역시체육회 사무처장 울산시 초대·2대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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