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오랜 이웃에 총겨눈 ‘신석구 사건’ 마을 전설로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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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오랜 이웃에 총겨눈 ‘신석구 사건’ 마을 전설로만 남아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3.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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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빨치산 신석구가 앙심을 품고 총으로 부인을 살해하고 칼로 유덕조에게 상해를 입혔던 언양면 태기리 집은 사건 후 70여 년이 훨씬 지났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있어 그날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미군정에 반발 토지 무상분배 요구
한국전쟁 이후 언양서 빨치산 활개

울주군 언양면 태기리 출신 신석구
마을 배급물자 배분에 앙심 품고
이장이던 유덕조에 상해 입히고
그 부인을 살해한 죄로 처형당해

한국전쟁 이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상 잘 모르는 주민들 끔찍한 피해
반공 앞세운 자들의 개인 감정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임 당하기도

아랫·윗마을 60가구 살던 태기리
윗마을 가르는 KTX 선로 지나면
담장 사이 신석구·유이장집 나란히
기와 지붕으로 개량된 유이장집
70년전 3칸짜리 목조건물 그대로

1948년 3월29일 울주군 언양면 태기리에서는 빨치산 신석구가 전호영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오랫동안 이웃으로 함께 살았던 유덕조의 부인을 살해하고 유씨에게 상해를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석구는 이런 행동을 할 때만 해도 다음 해인 1949년 그가 중인환시 속에 언양장에서 처형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양에서 빨치산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가 6·25 전후 신불산에 소위 ‘남도부 부대’가 자리 잡으면서다. 남도부는 본명이 하준수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대학까지 다녔던 엘리트였다. 해방 후 그는 북으로 가 인민군 소장이 된 후 1950년 부산을 함락하라는 김일성 지령을 받고 신불산으로 왔다. 이후 그는 신불산에서 활동하다가 국군의 빨치산 소탕작전 시 나중에 대구 민간인 집에 피신해 있다가 1954년 1월 특무대 요원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당시 울산 동구 일산동 출신의 송용고 특무대원도 체포 작전에 가담했는데 송씨는 꼭 2년 뒤인 1956년 1월 서울 원효로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을 암살하는 바람에 사형당하고 말았다.

남도부가 신불산 빨치산 대장이 되기 전 옛 언양면에서 빨치산이 되었던 인물이 신석구다.

해방 직후 울산에는 남로당이 공산당 지령을 받아 농지의 무상분배를 외치자 이에 동조한 농민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많은 농민들이 나중에 미군정이 대대적인 탄압을 하자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는데 특히 언양면 대곡리 일대에는 빨치산 사령부가 생겨날 정도로 빨치산이 활개를 쳤다.

빨치산은 총으로 무장한 후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의류 등 생필품을 훔쳐 가고 이에 대항하는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언양 태기리 출신의 신씨 역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신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지었지만 성격이 급했다. 이런 급한 성격 때문에 그는 일제강점기 마을 이장이었던 유덕조가 마을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배급물자를 나누어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유씨 부인을 살해하고 유씨에게는 상해를 입혔다.

신씨는 결국 의용경찰에 잡혀 언양 장날 언양초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참수 당했다. 신씨의 참수 소식은 참수 며칠 전 입소문으로 언양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져 언양 사람들 중에는 그의 참수 장면을 지켜본 사람이 많다.

당시 언양초등학교 6학년으로 현장을 지켜보았던 김영모 전 중앙대 교수는 “6·25 한해 전 신석구를 사거리에서 참수한다고 해 어른들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참수가 끝나 몸은 의자에 묶인 채 목에는 대나무가 꽂혀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석구는 죽은 후에도 평안을 찾지 못했다. 시신은 한동안 참수 장소에서 가까운 시외버스 정류장 맞은편 이정표에 걸려 있어야 했다.

이런 비극은 6·25 당시 울산 중심가였던 시계탑 사거리에도 있었다. 당시 대운산에서 잡혀 참수당한 빨치산 머리를 누가 이곳에 옮겨다 놓았다. 군모가 씌워졌던 이 시신의 입에 누군가가 짓궂게도 담배를 물려 이 인근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유 이장의 아들 교환씨는 사건 후 집은 비워둔 채 부친과 함께 언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울산제일중학교와 울산농고, 서울공대를 거쳐 한때는 울산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유덕조씨는 나중에 그가 겪은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유씨는 사건 후 언양을 거쳐 남구 신정동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이때 김정길 경남매일신문 기자와 이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당시 유씨는 83살이었다.

“사건이 났을 당시 태기리 부락에는 우리 집을 포함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빨갱이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에 살았던 신석구가 빨갱이가 되어 전호영 등 다른 2명과 함께 총을 들고 나를 찾아와 대문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나갔더니 ‘평소 우리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이런 영감쟁이는 죽여야 한다’면서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이때 우리 집 안사람(안삼금 당시 43세)이 나를 가로막고 ‘우리 영감을 데려가려면 나부터 죽이고 데려가라’고 울부짖자 신석구가 총을 쏘아 집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였지요. 그리고 나를 일본도로 쳐 오른 팔이 반쯤 잘리고 새끼손가락이 베어 날아갔습니다. 이때 내가 기절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귀를 베어갔습니다. 그 놈들은 부모형제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아니었고 우리 동족도 아니었고 지옥에서 온 아귀들이었습니다.”

사상적 갈등은 사상이 무엇인지 몰랐던 무고한 주민들에게도 끔찍한 피해를 주었다. 단지 빨치산과 소통하고 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많았고 때로는 반공을 앞세운 자들의 개인감정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언양에서 6·25 때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이런 살육전을 지켜보았던 박창우(82세·부산 거주)씨 얘기다.

“6·25 직후 신불산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날 제가 언양초등학교에서 좀 떨어진 창고 쪽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빨치산들이 엮이듯 앉아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그들이 고문을 얼마나 당했던지 얼굴과 손발에 성한 곳이 없었지만 그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3일 후 그 창고로 다시 가 보니 마침 그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들판으로 끌려가는데 그중 여자 한 명이 순경을 보면서 ‘오빠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살려주세요’하면서 울부짖었지만 총살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곳이 언양중학교 북쪽 산기슭에 있었던 ‘살도배기’라는 곳이었는데 이후에도 많은 주민들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이곳에서 즉결 처형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밤이면 이곳에서 귀신이 나타난다면서 가기를 꺼렸습니다.”

6·25 직전 이처럼 큰 사건이 일어났던 태기리는 지금은 한적한 산골이다. 태기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건 당시 윗마을에는 50여 가구, 아랫마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다.

마을에 들어서면 태기 경로당이 오른편에 있다. 이 맞은편 집이 옛날 신석구와 유 이장 집을 함께 덮쳤던 전호영 집이다. 이 집은 6·25 때 경찰이 불을 질러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나 지금은 개량 기와집으로 변해 마을 사람이 살고 있다.

신석구 집은 아랫마을에 있다. 윗마을 중앙으로 통과하는 KTX 철로를 머리에 이고 지나면 오른편 골목 안에 신석구와 유 이장이 살았던 집이 있다.

길 옆 첫 집이 신씨 집이고 이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 이장 집이 있다. 신석구 집은 한때 외양간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가 되어 있다. 사고 당시 창고 뒤쪽에는 유 이장 동생 인조가 살았다.

유 이장 집은 지붕만 기와로 개량되었을 뿐 집 형태는 사건 당시 그대로다. 3칸 목조건물은 집 중앙에 마루를 두고 마루 뒤로 큰 방이 있다. 마루에는 사건 당시 유 이장의 아들 교환이 숨어 떨면서 어머니가 총에 맞아 살해되고 아버지가 칼에 찔려 기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집 기둥이 그대로 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방에는 부엌으로 나갈 수 있는 부엌문이 있다. 유 이장은 신석구가 자신을 불렀을 때 이 문을 빠져나가 도망할 생각이었으나 신석구 일당이 이미 사방에서 지켜 마당에서 참변을 당했다.

사건 당시 어린 나이로 이 마을에 살면서 비극을 지켜보았던 김정학(81) 전 태기리 이장은 “사건이 일어난 지 7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사건과 관련된 가족이 모두 이 마을을 떠나 ‘신석구 사건’은 지금은 마을의 전설이 되어 마을 경로당에서 노인들 사이에 가끔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말한다. 신씨는 참수당할 때까지 혼자 살았지만 태기리에는 부모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건 후 마을을 떠나 부산 영도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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