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8칸짜리 집 빌려 학교로 운영…열악한 환경 이긴 배움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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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8칸짜리 집 빌려 학교로 운영…열악한 환경 이긴 배움 열정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5.0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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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신히 남아 있는 울산제일중학교 초기 학교 건물. 울산제일중학교는 복산동에 자리 잡기 전 잠시 학성동에서 학생들이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 학교 건물은 반구로터리에서 학성교로 가는 새 도로가 생겨나면서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남아 옛 교실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울산제일중학교는 울산의 명문으로 그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개교 직후 학생들이 교실 부족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울산 사람과 후배는 드물다. 제일중은 지금까지 졸업생만 해도 3만5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제일중은 6·25 다음 해인 1951년 우리나라 문교부 정책에 따라 6년제 울산농림학교가 중등과 고등으로 분리되면서 개교했다.

당시 우리나라 교육시설은 열악했다. 특히 울산은 6·25와 함께 대부분의 초중교가 군에 징발되면서 교사(校舍)가 부족했다.

제일중이 분리될 무렵 울산농림학교 학생들은 학교가 6·25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제23 육군병원으로 징발돼 학교 퇴비 저장소와 인근 재실에서 공부했다.

제일중 학생이 공부할 수 있는 교실을 갖게 된 것은 개교 일 년 후인 1952년이었다. 그것도 울산농림학교에서는 멀리 떨어진 학성공원 아래 기와막이었다. 이 학교도 간판만 걸었지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초대 교장은 박관수가 부임했다.

박 교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은사로 일제강점기 경기여고 교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교육경력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의 영구적인 식민지를 위해서는 일본식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초등학교 교장까지도 대부분 일본 교사를 임명했는데 이때 경기여고 교장을 한국인이 맡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울산 북구 어물동에서 태어났던 박 교장은 학력도 화려했다. 울산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와 동경제대 철학과를 수료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런 화려한 교사 경력 때문에 해방 후에는 오히려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피소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가 울산으로 와 잠시 울산농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울산제일중학교 교장이 된 것이 6·25 다음해다. 그가 제일중 교장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개교 때부터 1952년 2월 말까지 6개월간이었고 이후 다시 울산농림학교 교장이 됐다.

기와막이 있었던 학성동 마을은 당시 박 교장이 살았던 서원마을과 가까워 제일중이 이곳에서 개교한 것 역시 박 교장의 힘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일중은 학성공원 입구에서 서원마을로 가는 길 가에 있었다. 지금은 길이 좁지만 제일중이 개교할 때만 해도 반구동 사람들이 울산 도심으로 들어오려면 이 길밖에 없었다.

학교는 신축 건물이 아니고 당시 이 마을 부자였던 오순백의 집을 세 얻어 사용했다. 오씨는 당시 이 마을에 방이 4칸이나 되는 긴 기와집 두 채를 갖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들 각 방에 칸막이를 쳐 놓고 공부했다.

당시 오씨는 인근에 논밭을 많이 가진 부자였다. 제일중이 이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던 때는 개교 때부터 1953년 복산동으로 갈 때까지였다.

오씨는 해방 후 한동안 기와를 구워 팔았지만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할 때는 기와를 굽지 않았다. 단지 옛날에 구웠던 기와 중 아직 팔지 못했던 기와가 많아 이를 마당에 쌓아두었다.

학급은 10학급인데 방이 두 채를 다 합해도 8칸 밖에 되지 않다 보니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야외에서 수업을 했다. 더욱이 운동장이 없다 보니 입학식과 졸업식은 학교에서 가까운 학성공원에서 했다.

제일중 제1회 졸업생인 김명규 전 울산부시장은 “입학식 날 학교 운동장이 없어 입학식을 학성공원 꼭대기에서 했다”면서 “입학식 후 공부도 자주 학성공원에서 칠판을 걸어놓고 했는데 봄이 되면 벚꽃이 활짝 피어 경치는 좋았지만 벚나무에서 떨어지는 벌레들이 옷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수업 시간에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당시 열악했던 학교 사정은 3회 졸업생인 권정식 전 제독의 회고록에서도 알 수 있다. 권 전 제독은 회고록에서 “입학식은 운동장이 없어 도산성(학성공원)에서 했지만 다행히 공원 아래 폐 기와막을 가교사로 개조해 사용했다. 그러나 기와막은 바람은 막아 주었지만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추위가 심했다. 그래도 기다려지는 시간이 음악 시간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서울음대를 졸업하셨는데 전쟁 통에 울산으로 와 우리 학교에 잠시 몸담았던 것 같다. 선생님은 교실이 이처럼 춥다 보니 오선지에 음계를 달아 가르치시기를 포기하고 양지쪽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는 명곡을 불러 익혀주었다.”

제일중 졸업생 중에는 특히 이 음악 선생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많다. 4회 졸업생인 최종두 전 경상일보 사장은 “당시만 해도 울산에서 바이올린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음악 선생님은 바이올린을 학교에 가져와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들에게 악보 보는 법을 가르쳐 주어 우리들이 클래식에 일찍 눈을 뜨게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학생들이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나중에 학교에서는 음악 교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음악 교실에서 음악을 배우고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음악 선생은 복산동으로 학교가 옮기기 전 서울로 갔는데 아쉽게도 음악 선생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학생이 없다.

음악 선생 외에도 훌륭한 교사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피난 온 교사 중에는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엘리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제일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종덕 교사는 일본 유학파로 서양사와 웅변을 함께 가르쳤다. 부인이 시계탑 사거리 인근에서 조산원을 운영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던 신 선생은 항상 멋진 양복을 입고 다녀 멋쟁이 선생님으로 불리었다. 신 선생은 1979년에는 이 학교 12대 교장이 됐다.

우정동 천석꾼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보성중고등학교를 거쳐 부산 수산대학을 졸업했던 김창식 선생은 물상을 가르쳤는데 그 역시 당시 교사 두 달 월급을 주어야 사 입을 수 있는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니면서 멋을 내었다. 이외에도 영어를 가르쳤던 강기철·김유배 선생 역시 유학파로 실력이 있었다.

기와막에서 공부했던 학생들 중 인재도 많이 나왔다.

김태호 전 국회의원과 장승포 시장을 역임했던 김명규가 1회 졸업생이고 안우만 전 법무부 장관이 2회다. 심완구 전 울산시장, 권기술 전 국회의원, 권정식 전 제독, 오해룡 전 울산시의회 의장이 3회 졸업생이고 차수명 전 국회의원과 최종두 전 경상일보 사장 그리고 육사 18기로 별을 3개나 달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김정헌 장군이 4회다.

5회도 인재들이 많았다. 이문웅 전 서울대 교수와 ‘무궁화 박사’로 국내보다 해외에 더 잘 알려진 심경구 전 성균관대 교수 그리고 김성렬 전 울산시의회 의장이 5회다.

학교가 외진 곳에 있다 보니 학생들이 통학을 하느라고 고생했다. 심완구 전 시장과 심경구 박사는 집이 대현면에 있었는데 매일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꼴때나루까지 와 자전거를 배에 싣고 태화강을 건넌 후 다시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학생들이 학성공원 시절을 마감하고 복산동으로 온 때가 1953년이다. 기와막에서 일 년을 지낸 후 복산동으로 왔던 5회 졸업생들은 당시 기와막 학교 시설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가교사이긴 했지만 새 교실 10개를 지어 복산동으로 오니 교실이 흡사 궁궐 같았다”고 회상한다.

기와막에서 공부할 때 교사와 학생들은 마실 물이 없어 고생했다. 기와막에는 기와를 굽는 데 사용했던 우물이 하나 있었지만 이 우물물은 염분이 많아 식수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다행히 학교 건너편 서태진(徐泰鎭) 집에 수질이 좋은 우물이 있어 이 우물물을 얻어 마셨다.

옛 서씨 집에는 지금도 우물 흔적이 있는데 아들 서홍수(徐泓洙·71)씨는 “우리 마을은 바다와 가까워 우물물이 짜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는데 우리집 우물은 옛날부터 수질이 좋아 마을 사람들이 많이 가져다 마셨다”면서 “아마 당시 교사와 학생들도 우리 우물물을 마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기와막은 제일중이 처음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학교에서 동편으로 제법 멀리 송태관과 김홍조 어른의 집이 보였다. 고종 때 궁내부 시종원부경을 지냈던 송씨는 울산초등학교를 다녔던 아들 석하를 위해 서원마을에 대궐 같은 집을 갖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김좌성과 함께 울산 제일 부자였던 김홍조도 서원마을에 큰 한옥을 지어 놓고 살았다.

지금은 ‘학성공원 2길’의 도로명이 붙어 있는 옛 학교터는 상전벽해를 이루고 있다. 현재 반구로터리에서 학성교로 나가는 새 도로는 이 마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옛 학교 모습은 도로를 중심으로 서편에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있고 동편에 부속 건물로 사용했던 허름한 기와집이 있을 뿐이다.

집주인이었던 오씨는 오래 전 타계했고 대신 오씨의 며느리가 지금도 당시 학교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던 찻길 건너 기와집 옆에서 살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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