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무쌍하다고나 할까. 가을장마가 지겹도록 내리더니 갑자기 폭염이 내리 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역대급이라는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 동남쪽을 할퀴고 지나갔다. 태풍의 생채기가 채 아물기도 전에 추석은 다가왔고, 다시 폭염이 시작됐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은 생각보다 높다. 추석을 지난 대추나무에 붉은 대추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 전문(장석주)

대추(사진)는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 ‘대조(大棗)’가 변한 말이다. 대추는 지난 1990년 9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방영됐던 전원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서 많이 알려졌다. 드라마 제목처럼 대추나무는 가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또 열매인 대추는 다른 어떤 과일보다 많이 열린다. 결혼식 폐백에서 대추를 던지는 이유는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축복의 의미다. 씨가 있는 대추는 아들, 씨가 없는 밤은 딸을 상징한다. 특히 대추는 씨앗이 단 하나인데, 왕이 될 만한 후손이 나오라는 뜻이다.
대추는 제사상에 과일을 진설할 때 가장 먼저 놓는 품목이다. 조율이시(棗栗梨枾)이라는 말은 대추, 밤, 배, 감을 순서대로 놓으라는 말이다. 속설에 따르면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밤은 한 송이에 3톨이 들었으므로 삼정승을, 배는 씨앗이 6개라서 육조판서를, 감은 8개의 종자가 들어 있어 우리나라 조선 팔도를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대추나무는 강인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바람이 불어도 꽃이 지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 특히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 ‘벽조목(霹棗木)’은 양기가 제일 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손으로 자주 만지는 도장이나 염주, 묵주 등은 벽조목을 많이 사용했다. 벽조목는 단단하기가 돌보다 더해 도끼나 톱으로도 쉽게 쪼개거나 자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워낙 귀해 요즘에는 고온고압으로 압축해서 만든다.
올해 국민들은 오랜만에 거리두기 없이 추석을 지냈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마다 아이들 소리가 왁자했다. 시골 마당에 주렁주렁 열린 대추를 보면서 갈수록 줄어드는 인구를 생각한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