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고난의 역사 삼킨듯 해안선 따라 이어진 봉우리
상태바
[산중문답]고난의 역사 삼킨듯 해안선 따라 이어진 봉우리
  • 정명숙 기자
  • 승인 2023.01.26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송악산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산방산과 단산 그리고 사계리부터 서귀포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1. 송악산은 제주도 산방산의 남쪽,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바닷가에 불끈 솟아 있다.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있어 일명 ‘99봉’이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둘레 600m 깊이 69m의 제2분화구가 있으며, 주봉 너머 북서쪽에는 이보다 넓으나 깊이는 얕은 제1분화구가 있다. 송악산은 2중 폭발을 거친 화산으로, 큰 분화구 안에 두 번째 폭발로 주봉이 생기고 주봉 안에 깊은 제2분화구가 형성된 것이다. 제2분화구 안에는 검붉은 화산층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직도 화산 폭발의 뜨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송악산은 해발 104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동·서·남 세 면이 바닷가 쪽으로 불거져 나와 곧추선 10~14m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그만한 산이 드물다고 할 만큼 꽤 괜찮은 산이다.

송악산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와 관련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화산 쇄설물인 스코리아를 제주에서는 ‘송이’라고 하는데, 이 오름에 송이가 많아서 ‘송오름’ 또는 ‘송악산’이라 불렸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사록> <대정군지도> <원대정군지>에는 ‘송악산’(松嶽山 솔오름)으로 표기되었고, <탐라순력도>와 <제주읍지>에는 ‘송악’(松岳 솔오름)으로 표기되었다. 민간에서는 ‘솔오름’ ‘송악산’ 등으로 부르며, 이 외에도 절울이, 저별이악(貯別伊岳), 저벼리오름이라고도 불린다. ‘절울이’는 제주말로 ‘물결(절)이 운다’라는 뜻인데, 바다 물결이 산허리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노라면 이 말뜻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송악산은 일제강점기에 제주도가 어떻게 도륙당했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송악산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들이 모슬포에 알뜨르비행장을 만들면서 해안의 배를 감추기 위해 파놓은 동굴이 있다. 모두 15개가 있다 하여 일오동굴이라 부른다. 이 굴들은 일본군이 소형의 특수 잠수정을 숨겨두었다가 연합군 함정이 접근해오면 어뢰를 싣고 돌진해서 자폭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당시 제주 사람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것이다. 송악산 주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건설한 비행장, 고사포대와 포진지, 비행기 격납고 잔해 등이 흩어져 있다.

▲ 아들·조카와 함께 산행에 나선 필자(가운데).
▲ 아들·조카와 함께 산행에 나선 필자(가운데).

2. 송악산 둘레길은 제주 올레 10코스에 포함된다. 길을 걷다 보면 형제섬과 가파도, 멀리 마라도까지 볼 수 있다. 완만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방목해 놓은 말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주변에 막힘이 없어 날씨에 상관없이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길이 험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지만, 바람이 많은 편이다.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을 뒤로 하고 이어지는 해안 길은 푸른 바다 위에 조각처럼 떠 있는 형제섬을 끼고 돌아 송악산으로 연결된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가파도와 그 뒤 수평선 너머로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송악산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산방산과 단산 그리고 사계리부터 서귀포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보이고, 서쪽으로는 모슬포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으로는 마치 바다에 놓은 징검다리 같은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동쪽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형제섬은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 혹은 두 개로 보이고 그때마다 모습이 각각 다른데, 그중에서도 송악산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제일 멋지다.

산이수동 포구에서 해안을 따라 정상까지 도로가 닦여 있고 분화구 정상부의 능선까지 여러 갈래의 소로가 나 있다. 산 남쪽은 해안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화구 남쪽은 낮고 평평한 초원지대이고, 그 앞쪽에는 몇 개의 언덕들이 솟아 있다. 송악산은 예전엔 그 이름만큼 소나무뿐 아니라 동백나무·후박나무·느릅나무 등이 무성했다고 하는데, 일제가 군사기지를 만드느라 불태운 뒤 지금은 큰 나무 하나 없이 풀만 어렵사리 자라고 있다. 주요한 식물로는 사철쑥, 부처손 등이 있다.

▲ 송악산은 길이 험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지만 바람이 많은 편이다.
▲ 송악산은 길이 험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지만 바람이 많은 편이다.

3. 내가 간 날에는 비가 몹시 왔다. 바람까지 불어서 우산이 소용 없을 정도였다. 비바람 속의 제주도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입구에서 조금 걸으니 멀리 해안가 절벽 사이로 동굴들이 보였다. 파도의 위험 때문에 가까이는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카메라에 담았다. 해안 따라 왼쪽 모퉁이를 돌 즈음, 오른쪽으로 산 정상 가는 길이 나온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계단을 밟고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거대한 분화구 건너 정상이 보이는 곳에서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는 훨씬 더 컸건만 무섭지는 않았는데, 송악산 분화구는 지옥 입구 같은 무서움이 있었다.

분화구를 가운데 두고 왼쪽 능선을 따라 걸었다. 바다 풍경이며 분화구 풍경이 걸음을 뗄 때마다 다르게 다가왔다. 이때까지 산방산과 형제섬이 계속 따라왔다. 송악산과 산방산, 형제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리운 사이인가보다. 다시 해안 길을 따라 걷는데, 바닷가 무덤이 보였다. 가까이 갈 수 없어서 비석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떤 깊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아서 잠시 묵념하며 명복을 빌었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밝은 표정과 친절함에 고맙기도 하고 궁금도 하여 몇 마디 물음을 던졌다. 나와 같은 여행객이었다. 방향이 같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다가를 반복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그 사람은 잠시지만 함께 걷는 내내 밝은 표정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비에 지쳤던 마음과 몸이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나의 표정이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한다는 것.

공자는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고 했다. 태산이 그만큼 높다가 아니라 산을 오르는 공자의 마음이 그만큼 컸으리라. 산이 높다고 하여 높은 산이 아니며, 산이 낮다고 하여 낮은 산은 아니다. 산이 높고 낮음은 산을 오르는 사람의 마음의 크기와 같으리라. 산행을 마칠 무렵 내게 든 생각이다. 송악산이 높은 산이었다는 말이다.

송철호 울산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어리버리산악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