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화첩]외롭고 애달픈 삶을 더 귀하게 여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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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화첩]외롭고 애달픈 삶을 더 귀하게 여겨야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3.03.20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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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文殊寺)(75x36㎝, 한지에 수묵담채. 2023)
문수사(文殊寺)(75x36㎝, 한지에 수묵담채. 2023)

울산을 그리고, 세상을 읽는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울산화첩’을 올해도 연재합니다.

한달에 한번씩 익숙한 풍경 속에 사유의 미를 담아 공유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치유와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문수산 간다. 울산이 친애하는 문수산 간다. 문수산은 울산 울주군 범서읍, 청량읍, 삼동면 경계에 걸쳐 있다. 문수산(600m)은 문수봉과 영축산을 거느리고 있다. 망해사를 거쳐 영축산과 문수봉을 오르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등산 코스다. 더하여 문수산 정상을 거쳐 문수사와 청송사, 영축사지를 답사한다면 울산 불교의 성지 순례길이 된다. 문수산 일대는 울산 불교이자 신라불교,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문수산과 문수점에 대하여

영축산과 청량산은 문수산으로 현재의 문수산 일대 산을 통칭한다. 문수산은 조선시대인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데, “문수산(文殊山)은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이어 “망해사(望海寺), 청송사(靑松寺) 모두 문수산에 있다”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영취산’은 영축산으로 독음 되고 문수보살 설화와 겹쳐지면서 문수산이 되었다. 여기서 말한 영축산은 울주군 삼남면과 양산 통도사 경계에 있는 영축산과는 다른 산이다. 문수산이 청량산으로 불렸다는 기록은 1934년 <울산읍지>에 나타나는데, “문수보살이 그 산의 청량함을 사랑하여 머물렀다. 그래서 청량이라 하고 또 문수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자장율사가 유학한 중국 오대산이 여름에 덥지 않고 시원하다는 청량산이다. 자장은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 문수보살이 살던 산이 청량산이다. 이런 관계로 청량산이 문수산으로 불렸다고 하겠다. 또한 영취산에 기거하던 낭지 스님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으로 갔다는 설화에서도 이 지명을 확인하겠다.

<삼국유사>에는 영취산에 살던 연회(원성왕의 국사)가 문수보살을 만난 곳이 문수점(문수산 자락에 있는 고개)이라 했다. 문수점은 지금의 율현(밤티 고개)으로 율리에서 울주 웅촌면 대복리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연회가 문수보살을 만난 서령(西嶺)은 <대동지지>에서 말하는 서로(西路)이다. 서령은 서로로 지금의 율현이다.(민긍기의 <울산의 지명> ‘율현과 문수점’)



◇문수산 아래 율리는 불국토

울주군 청량읍 율리는 동쪽에 영축산, 중앙 문수산, 서쪽 남암산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다. 문수산 아래 넓게 자리한 땅 율리에는 일찍부터 신라인들이 부처의 나라를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신라인들은 율리에다 불교 이념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나라를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영축사와 망해사와 청송사 등을 건립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영취사(영축사)는 신라 신문왕 때에 세웠다. 율리 영해마을 영축사지는 2012년부터 시작된 5년간의 발굴, 조사를 통해 금당지를 중심으로 쌍탑이 위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가람배치 양식이 확인됐었고, 그 규모가 경주의 감은사에 비견되는 사찰임이 드러났다.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을 위해 지은 절로 18세기 이전에 폐사되고 망해사 터에는 1956년에 건립된 망해사가 있다. 청송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청송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1810년 무렵에 폐사되었다.

디지털 <울산역사문화대전>에는 문수사가 자장이 창건되어 전한다고 되어 있다. 자장이 창건했다는 설은 근거 없는 말이다. 문수사가 연회 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기록 또한 잘못된 것이다. 연회 국사는 뜰 연못에 연꽃 몇 송이가 일 년 내내 피어 있었다는 영축사에서 기거했다. 문수사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와서 1749년 <학성지> 사찰조에 “문수암은 문수산 중턱에 있다”라고 했다. 이 기록 이전에 울산 구강서원 초대원장을 지낸 이채(1616~1666)의 ‘문수암’ 한시가 있다. 조선후기 의민 스님과 울산 사림인 이양오, 이준민의 한시에도 문수암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언양 사림 김영걸(1876~1927)의 ‘문수암의 초여름’ 한시에도 문수암이 보인다. 문수암이 문수사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현대에 와서다. 문수사는 1973년에 울산시 전통 사찰 제3호로 지정되었다.

▲ 문수사(文殊寺)(75x36㎝, 한지에 수묵담채. 2023)

신라시대 이후 문수산은 문수사상인 지혜의 빛을 밝힌 등대와 같은 산이었다. 우리의 삶은 그 빛을 찾아 헤매면서 나아간다. 문수산에서 활동했던 낭지와 지통 스님이 그랬고, 연회 국사가 그랬다. 당시의 민중이나 지금의 우리도 그렇다. 그런데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활하다가 모자라고 어리석고 답답하게 산다고 느껴질 때 문수산에 가자. 울산이 친애하는 문수산에 가자. 가서 외롭고 애달픈 삶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문수의 지혜를 담자. 율리 불국토를 밟고 걸으면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림=최종국 한국화가·글=문영 시인

※QR코드를 찍으면 간단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은정 인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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