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김명리 ‘음이월 지나고 김천 지나고’
상태바
[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김명리 ‘음이월 지나고 김천 지나고’
  • 경상일보
  • 승인 2023.04.03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천포 딸네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삼천포 둘째 딸이 준 거라며
동백 꽃분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동백꽃 몽오리 할머니 자태처럼 곱다 하니
이런 꽃분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내 손 마주 쥔 수전증 앓는 왼손보다
저 꽃분 더 꽉 움켜잡은 오른손이
덜덜덜 덜덜덜 떨리고 있다
먼저 간 영감탱이를 바닷물 깊은 곳에
아주 묻고 오는 길이라 했다
남대문에서 노점하는 막내아들 내외
더운 밥 해주러 가는 길이라 했다
만상(萬象)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는지
차창에 부딪고 저 홀로 사무치는 봄밤
음이월 지나고 김천 지나고
그예 동백꽃 모가지들 다 떨어져 내리고
봄밤은 이제 막 추풍령 고개를 오르고 있다



“지나온 세월의 반환점서 느끼는 서럽고 그리운 감정”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음이월 지날 때쯤 이 시를 다루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만 시간이 마음을 앞질렀다. 그래도 올해는 이월이 윤달이니 우리는 아직 음이월을 건너가는 중.

음이월은 영등할매가 왔다가 돌아가는 달이라 바람이 사납다 하는데, 이 시에도 모진 해풍 맞은 듯 신산스러운 생을 보낸 할머니가 나온다.

어부였을 남편을 먼저 보내고, 막내아들네 밥을 해주러 서울로 가고 있는 할머니. ‘영감탱이’란 말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지만, ‘이런 꽃분이 다 무슨 소용이냐’에선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난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니 삼천포와 서울 사이도 마찬가지이리라. 고개는 삶의 변환점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이제야 남편을 놓아주고 낯선 세상 앞에 섰다. 둘째 딸이 준 동백꽃 화분을 ‘꽉’ 움켜잡았다는 데서 서울살이에 대한 할머니의 걱정과 불안이 느껴진다. 한때 동백꽃처럼 고운 자태였을 할머니는 지난 세월의 무상함과 지낼 세월의 속절없음 사이에서 덜덜덜 떨고 있으니, 만상이 제가끔 사연을 안고 흘러가는 봄밤의 사무침이 저와 같다.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대형 개발로 울산 해양관광 재도약 모색
  • [기자수첩]폭염 속 무너지는 질서…여름철 도시의 민낯
  • 신입공채 돌연 중단…투자 외 지출 줄이고…생산직 권고사직…허리띠 졸라매는 울산 석유화학업계
  • 아마존·SK, 7조규모 AI데이터센터 울산에
  • 울산, 75세이상 버스 무료 교통카드 발급 순항
  • 방어진항 쓰레기로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