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진은영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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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진은영 ‘청혼’
  • 경상일보
  • 승인 2023.04.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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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연인들

오랜 시간 함께 한 연인이 있다.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하지만 어느 순간, 그러니까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귓가에 별들의 노래가, 혹은 잉잉거리는 벌들의 노래가 들릴 때, 그 놀라운 순간, 연인은 청혼을 결심한다. 아니, 청혼의 순간 연인들은 별처럼 높은 희망에 부풀어 있고, 꿀벌처럼 달콤한 사랑에 빠져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청혼은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세레나데다. 독창은 중창이 되고, 중창은 합창이 된다.

청혼을 하면서 연인은 맹세를 한다. 아첨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할 것이며, 약속을 꼭 지킬 것이며, 이젠 나만이 아닌 너와의 시간을 가꾸어 가겠다고. 하지만 이 시의 놀라움은 마지막 연에 있다.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 바로 ‘너’를 위해 ‘쓴잔’을 마시겠다는 것. 기쁨이 아닌 슬픔을 들이켜겠다는 것. 투명 유리 조각 같은 슬픔을 들이켤 때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프겠지만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것. (발을 디딜 때마다 칼날을 밟듯 아플 거라는 예고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주고 두 발을 택한 인어공주를 생각해보라). 그러니 세상이 아직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청혼하는 연인들이 있기 때문.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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