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에 휩쓸린 선조들의 고행과 기개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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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에 휩쓸린 선조들의 고행과 기개 기려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3.04.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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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일로 함께 귀양 갔다 온 10여명의 선조들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10가문의 후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온지 100주년이 됐다. 학성이씨 문중은 최근 십가계(十家契) 수계(修契) 100주년을 맞아 <계림사화(鷄林士禍) 논총>을 발간했다.

<계림사화 논총>에는 ‘계림사화의 배경과 영향 고찰’ ‘동도의 계림사화’ ‘울산 유림의 학맥’ ‘유배일기’(太和堂北征錄), 조철제 경주문화원장의 ‘중세의 사론’ 등이 수록됐다.

계림사화는 조선 경종 2년(1722) 경주를 비롯한 울산과 영천 등 남인 사림들이 노론 정권에 저항하다 화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울산 출신으로 계림사화에 연루돼 유배형에 처했던 태화당(太和堂) 이광희(1688~1746)가 쓴 <태화당일고>(太和堂逸稿)에 자세한 내용이 수록됐다.

이 책을 보면 1722년 태화당이 경주 육영재(育英齋)에서 유생을 모아 강학할 무렵 진사였던 한시유(韓是愈)가 경주에 인산사(仁山祠)를 지어 송시열(宋時烈) 영정을 봉안하다 보니 이곳이 자연히 노론의 집결지가 됐다. 하지만, 노론이 어느 날 송시열 영정을 몰래 숨겨 놓고 육영재 사람들이 영정을 훼손했다고 경주 관아에 고발하는 바람에 영조 1년(1725)에 육영재에서 공부하던 유생 29명이 수감됐고, 태화당을 비롯한 10여명이 유배형을 받았다. 태화당도 함경도 명천까지 유배를 가야 했다고 기술돼 있다.

태화당은 귀양을 갔다 돌아오는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에는 태화당이 영조 1년(1725) 8월24일에 울산을 떠나 경주를 거쳐 포항, 영해, 평해, 울진, 강릉, 양양, 통천, 원산, 영흥, 함흥, 북천, 단천, 마천령, 길주를 거쳐 10월17일이 명천에 도착했다고 돼 있다. 귀양을 가는 데만 두 달 가까이 걸린 것이다.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은 지난 2019년 펴낸 <학성세고>(鶴城世稿)에 태화당에 대해 “公(공)께서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호걸 기풍을 지녔으며 문장과 예법이 뛰어났다. 외침이 있자 출정해 전공을 세우고 경종 2년 계림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명천에 3년간 유배됐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계림사화 논총> 편저자이자 태화당 10세손인 이남호씨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며 “이번 모임으로 선조의 높은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책을 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상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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