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이정록 ‘그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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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의 월요시담(詩談)]이정록 ‘그럴 때가 있다’
  • 경상일보
  • 승인 2023.05.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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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뜨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무한히 얽혀있는 존재를 자각하고 염려하는 마음
인연생기(因緣生起). 불교에서는 존재는 모두 인과 연으로 얽혀 있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상에 펼쳐진 인드라망의 그물에는 무수한 구슬이 달려있어 서로를 비추며 중중무진으로 관계를 맺어간다고 한다. 이 시는 소소한 데서 얽힘과 공명의 낌새를 보여 준다.

1, 2연은 슬픔의 생기이다. 일상에 어떤 덜컹거림이나 떨림이 있다면 어느 먼 곳에서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러한 자각은 행동을 순하게 만든다. 내가 쥔 주먹이 잠든 아이를 깨울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 그리고 이젠 타인에게도 손을 내민다. 불씨를 나누어주는 촛불처럼.

그럴 때가 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때죽나무꽃이 소리 없이 떨어지거나 햇살 환장하게 맑은 날 느닷없이 눈물 도는 때. 인드라망의 구슬엔 어린 거북이 비닐을 삼키거나 죽은 새끼를 등에 지고 다니는 어미 고래의 모습이 담겼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엔 무심코 돌덩이를 걷어차서 소리를 질렀다. 어느 전선에서 누군가 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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